하나님의 나라 들어가기 프로젝트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과 자신의 재물을 지키는 것 사이에서 갈등했던 한 사람의 질문은 자연스럽게 부(富)에 관한 참된 제자도의 가르침으로 연결됩니다.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가르침에 이 부자는 근심한 후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막 10:2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물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걸림돌(skandalon: stumbling block)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부유함의 위험성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막 10:23) 그리고 예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24) 그런데 제자들이 그(예수)의 말씀들에 놀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시 대답하여서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25)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쉽다.” (26) 그러나 그들은 더욱 놀라며 서로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27) 예수께서 그들을 바라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Translated by YG Kim)
예수님께서는 장소적 이동 없이 그 자리에서 주위를 둘러보시는 행동을 통해 재물을 많이 가진 한 사람의 거절에 대한 실망감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막 10:23b).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상관 관계를 단순히 윤리적 권고가 아니라 구원론적 관점(soteriological perspective)에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막 10:23b)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던 한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기 위한 질문과도 연결되어지고(막 10:17b), 구원 받는 것 과도 연결되어집니다(막 10:26b). 따라서 자신만을 위한 부유함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장애물이 되며, 동시에 부를 추구하는 삶은 하나님의 통치에 저항하는 세속적인 개념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속이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부유함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호의와 복(God’s favor and blessing)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들은 놀랐습니다(막 10:24a). 제자들의 놀라움은 부유함이 오히려 구원의 장애물이 된다는 충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놀라움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자녀들’(tekna: Children) 이라는 애정 어린 표현을 통해 예수님과 제자들의 자녀 관계(filial relation)를 설정하시면서 다시 한번 재물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관한 어려움을 강조하십니다(막 10:24c).
예수님께서는 부유함의 심각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낙타와 바늘귀라는 소재를 통하여 극도의 과정법(hyperbole)을 사용하십니다. 예수님 당시에 낙타(kamelos: camel)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가장 큰 육상 동물로 통용되고 있었고, 바늘귀(the eye of a needle)는 가장 작은 구멍을 상징했습니다. 따라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해석이 문자적으로 불가능함으로 학자들은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Robert H. Stein, Mark, Baker Academic, 2008, p. 472).
첫째, 예수님께서 비유로 사용하신 단어는’카멜로스’(kamelos: camel)가 아니라 ‘카밀로스’ (kamilos)로 항해사들이 배에서 사용하는 굵은 ‘밧줄’(rope, ship’s cable)을 의미하는데, 발음상 유사성으로 인하여 성경에 잘못 기록되었다는 주장입니다(Paul Haupt, II. PHILOGICAL AND ARCHEOLOGICAL STUDIES. “1. Camel and Cable”, American Journal of Philology 45 (3), 1924, pp. 238-259). 그러나 이러한 단어의 변화로도 여전히 문자적으로 밧줄을 바늘귀에 넣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둘째,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에는 ‘바늘귀’를 의미하는 ‘투루마리아스 테스 라피도스’(the eye of a needle)와 발음이 유사한 성문(gate)이 있었는데, 그 문을 낙타가 매우 어렵게 통과할 수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고고학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Robert H. Gundry, Mark: A Commentary on His Apology for the Cross, Eerdmans, 1993, p. 565).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재물을 많이 소유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인간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영역임을 강조하신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더욱 크게 놀라면서 구원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막 10:26b). 우리가 이미 생각해 본 것처럼, 예수님 당시에 부유함이란 하나님의 축복과 순종의 결과로 여겨졌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세계관에 완전히 반대되는 충격적인 선언이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의 극적인 반응은 예수님의 대답을 위한 필수적인 전주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반응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이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막 10:27b). 제자들이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막 10:26b)라는 구원론적인 질문에 예수님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라는 사실을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구원을 받는 것에 관한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전능성(the omnipotence of God)을 강조하시면서,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확신을 보여주십니다(막 10:27). 예수님의 선언은 부자의 구원이 인간의 생각이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는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인간의 행위나 공로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어진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면 이 부자는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미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 길은 자신의 전 재산을 가난한 자들과 나누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막 10:21). 예수님의 말씀에 이 부자는 순종하지 못했지만, 누가복음 19:1-9절에 기록되어 있는 키작은 삭개오는 세리장의 역할을 통해 부정적으로 벌어들인 많은 재물을 가난한 자들과 나눔으로 구원에 참여했습니다(눅 19:9). 그러나 이 부자는 재물을 더욱 사랑했기에,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재물에 관한 신뢰를 버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때 구원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자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신들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과 다르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사실을 강조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신과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는 자들을 향한 보상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막 10:28) 베드로가 그(예수)에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들을 버리고, 당신을 따랐습니다. (29)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들에게 말한다. 나와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들이나, 자매들이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들이나, 밭을 버린 사람이 (30) 지금 이 시대에서 집들과, 형제들과, 자매들과, 어머니들과, 자녀들과 밭들을 핍박과 함께 백배나 받게 될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31) 그러나 많은 먼저 된 자들이 끝이 되고, 그리고 끝이 된 자들이 먼저될 [것이다.] (Translated by YG Kim)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신과 복음 때문에 그들의 삶의 터전인 집과 밭, 그리고 가족 관계 속에서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자녀들을 버리고 스스로 희생의 길을 걸어간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을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복음(euangelion: Gospel)과 동일시 하여서 동격(apposition)으로 말씀하고 계신데, 결과적으로 예수님 자신이 복음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인하여 이 땅에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거나 가족 관계가 끊어졌을 때 그들에게 주어지는 두가지 보상을 강조하십니다.
첫째, 현재의 삶 속에서 받는 복입니다(막 10:30a). 이 복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이나 가족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하나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가족 관계와 땅을 백배(a hundredfold)로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이 땅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박해(diogmos: persecution)와 더불어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지속적으로 박해가 있는 이유는 그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이 지상에서의 고난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남을 의미하지 않음을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가족 관계 속에서 ‘아버지’(pater: father)가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에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오는 세상에서 주어지는 복은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입니다. 이 복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삶의 터전과 가족 관계를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약속된 궁극적인 구원을 의미합니다. 결과적으로,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뛰어 넘어선 종말론적 행복을 의미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헌신에 대한 최종적인 구원(salvation)에 관한 선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이 많은 한 사람의 질문에서 시작된 영원한 생명에 관한 대화 가운데에서 종말론적인 반전(eschatological reversal)의 관계를 설명하십니다(막 10:31). 이러한 전복적(subversive) 관계는 “먼저 된 자들이 끝이 되고, 그리고 끝이 된 자들이 먼저”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마음 속에서 생각하고 먼저 된 자들과 끝이 된 자들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바로 열두 제자들과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부자입니다. 제자들은 이미 누가 큰 자인지에 관한 논쟁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전복적 관계의 의미를 들었습니다(막 9:33-37). 그리고 이러한 논쟁은 제자들을 향한 종말론적인 반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예수님의 경고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모습을 늘 되돌아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함께 나누기>
- 우리는 부유함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데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부유함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상관 관계를 윤리적 경고가 아니라 구원론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재물을 구원론적 관점에서 사용하고 있습니까?
- 예수님 당시에 부유함에 관한 일반적인 통념은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께서는 부유함이 구원의 장애물이 된다고 강조하고 계십니까?
-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과장법의 의미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학자들이 제시한 두 가지 방법과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하지 않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구원은 인간의 노력의 결과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주권입니까?
-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던 한 사람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복음과 동일시하십니다.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전할 수 있습니까?
- 복음으로 인하여 삶의 터전과 가족 관계의 상실을 경험했을 때 주어지는 두 가지 보상을 설명해 보십시오.
-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먼저 된 자들이 끝이 되고, 그리고 끝이 된 자들이 먼저”된다는 의미를 설명해 보십시오.
복음에 빚진 자 김윤규 목사 (토론토 쉴만한물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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