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te icon The ChristianTimes

(2)경건주의 가정의 아이, 그리고 교회를 떠난 철학자_칸트의 성장과 종교적 배경

mozart statue in salzburg s historic square

Photo by Sebastien Devocelle on Pexels.com

(2)경건주의 가정의 아이, 그리고 교회를 떠난 철학자

— 칸트의 성장과 종교적 배경

1724년 4월 22일,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오늘날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세례를 받았다. 독실한 루터파 경건주의 신자였던 부모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세례명은 ‘임마누엘(Emanuel)’. 훗날 이 아이는 스스로 히브리어 성경의 발음에 따라 자신의 이름을 ‘임마누엘(Immanuel)’로 고쳐 쓰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의 이 이름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이 철학자가 평생 씨름했던 질문, 즉 하나님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가라는 물음과 묘하게 겹친다.

칸트의 부모는 경건주의자였다. 경건주의(Pietismus)란 17-18세기에 루터교 안에서 일어난 신앙 갱신 운동으로, 슈페너(Philipp Jakob Spener)와 프랑케(August H. Francke) 같은 인물들이 이끌었다. 교리 중심과 교권주의로 굳어버린 루터교 정통주의에 반발하며, 신앙의 체험과 성경 공부, 그리고 삶 속에서의 성화(聖化)를 강조한 운동이었다. 칸트는 이 경건주의적 신앙의 공기를 마시며 자랐다.

8세 때 그는 라틴어 학교인 프레데릭 학교(Collegium Fridericianum)에 입학했다. 이 학교 역시 경건주의의 색채가 강했다. 칸트는 그곳에서 성경 헬라어와 라틴어, 수학, 자연과학 등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그런데 8년간의 학창 시절 동안 그는 무언가를 목격하게 된다. 바로 동료 학생들의 열정적인 기도와 찬양, 그리고 실제 삶 사이의 간극, 즉 위선(hypocrisy)이었다. 종교적 열정이 넘쳐흐르는 겉모습과 달리, 실제 행동은 그와 딴판인 경우를 거듭 보면서 칸트는 종교적 열정 자체에 대한 깊은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칸트는 당시에도 교회에는 출석했지만 기도하고 찬양하는 일을 멈추었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아예 교회에 발을 끊었다. 훗날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총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교수들을 성당 안으로 인솔한 후 정작 자신은 도망쳐 나왔다는 일화는 그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칸트가 교회를 떠난 것이 하나님을 부인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예수를 거부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성경을 탐구하고 기독교 신학을 연구한 사람이었다. 청소년기에 히브리어를 스스로 공부하고 자신의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고쳐 쓴 것이 그 방증이다. 16세에 입학한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신학 수업을 들었고, 평생의 학문 여정에서 성경의 내용과 기독교 교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사유를 펼쳐나갔다.

칸트가 1755년에 익명으로 출판한 첫 저서 『자연의 일반 역사와 천국에 대한 이론』에서 이미 종교와 과학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와 기독교 신앙을 이성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미신적 행위라고 보았다.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것은 오히려 종교를 망가뜨린다는 인식이었다.

나중에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 칸트는 이렇게 경고했다. ‘만약 성서신학이 종교는 이성과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이성에 대해 선전 포고하고 지속적으로 이성에 대항한다면, 그런 종교는 결국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그는 또한 신학교를 졸업하는 사람은 반드시 철학적 종교학을 이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래야 신학자들이 철학자들이 제기하는 난제들에 논리적으로 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결혼하지 않았고, 규칙적인 생활로 유명했으며, 쾨니히스베르크를 거의 떠나지 않고 평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리고 80세가 되던 1804년, ‘이만하면 충분해(Es ist gut)’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토록 교회를 멀리한 그가 쾨니히스베르크 성당 묘지에 안장된 것, 그리고 2005년 푸틴 대통령이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을 ‘임마누엘 칸트 러시아 국립대학’으로 개명한 것은 그가 남긴 사상의 무게를 오늘도 증거하고 있다.

교회를 나간 자가 성경을 가장 깊이 읽었다. 종교를 이성 앞에 세운 자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칸트의 삶은 시작부터 하나의 역설이었다. 그리고 그 역설 안에 그의 신학적 천재성이 숨어 있다.

Exit mobile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