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인가?
— 칸트의 인간론과 원죄 논쟁
칸트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는 네 편의 논고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논고의 제목은 ‘악한 원리가 선한 원리와 공존함에 대하여, 또는 인간의 본성에 있어서 근본 악에 관하여’이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칸트는 여기서 전통적인 기독교의 인간 이해, 특히 ‘원죄론(the doctrine of original sin)’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인간의 세 가지 본성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세 가지 본성적 소질을 지닌 존재다. 첫째는 ‘동물성(Tierheit/animality)’이다. 야만성과 무법성이 주관하며 이성이 요구되지 않는 본능적 차원이다. 둘째는 ‘인간성(Menschheit/humanity)’이다. 일종의 자애(self-love)라 할 수 있는데, 이성이 작동하긴 하지만 그 이성이 평등을 추구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질투와 경쟁, 시기, 감사하지 않음, 악의 등으로 가득 차 있다. 셋째는 ‘인격성(Persoenlichkeit/personality)’이다. 오직 이 인격성만이 도덕 법칙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고, 합리적이며, 책임을 질 수 있고, 선한 의지를 발동시킬 수 있는 이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칸트는 인간이 이 세 가지 소질 중 앞의 두 가지에 저항할 수는 있지만, 어느 하나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고 했다. 인간은 이 복합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악으로 향하는 성향, 그러나 극복 가능하다
칸트는 인간 안에 악으로 향하는 성향(Hang/propensity to evil)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 성향은 연약성(frailty), 불순성(impurity), 부패성(corruption)을 포함한다. 그는 이 대목에서 로마서 7장 19절을 직접 인용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하는도다.’
그러나 칸트는 여기서 결정적인 구분을 한다. 악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악한 ‘의지’를 갖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이 죄를 범하는 것은 악한 성향 때문이 아니라, 악한 의지를 가지고 그렇게 행동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악한 성향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악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다. 따라서 인간을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원죄론에 대한 비판
바로 이 지점에서 칸트는 전통적인 원죄론을 비판한다. 그는 의학이 죄를 유전병으로, 법학이 죄를 상속 부채로 규정하는 것처럼, 신학이 원죄를 교리화한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드는 ‘가장 부적절한(the most inept)’ 교리가 되었다고 했다.
칸트는 로마서 3장 9-10절을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한다. ‘그들은 모두가 죄인입니다. 선을 행하는 이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상태’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의 결과’에 대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즉, 이 구절은 인간이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선언이 아니라, 누구나 도덕법에서 이탈하는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경고라는 것이다.
칸트는 인류 최초의 인간 상태를 ‘결백 상태(the statute of innocence)’라 불렀다. 최초의 인간에게는 우리가 경험으로 갖게 된 죄의 경향성을 처음부터 전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의 기원’이라 부르기보다는 ‘최초의 의지의 사용’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했다.
마음의 혁명과 새 인간
그렇다면 칸트는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어디서 찾는가? 그는 ‘마음씨(Gesinnung/cast of mind or ethos) 안에서의 혁명’에서 찾는다. 사유 방식의 근본적인 대전환이 일어날 때, 인간은 새 창조를 이루고 새로운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대목에서 요한복음 3장 5절, 골로새서 3장 9-10절, 에베소서 4장 22-24절 등 성경 구절을 연이어 인용한다.
그런데 칸트는 이 모든 변화의 주체가 인간 자신이라고 강조한다. 인간에게는 신으로부터 주어진 선험적 도덕 명령, 즉 ‘정언명령(kategorischer Imperativ/categorical imperative)’을 이행할 자유(Freiheit)가 있다. 인간이 자발성과 자율성을 통해 도덕법을 이행할 때 가장 이상적인 인간이 된다는 것이 칸트의 확신이었다.
결국 칸트는 이성적 인간이 이성을 사용하기도 전에 이미 죄인으로 낙인찍히는 것은 이성을 마비시키는 행위라고 보았다. 그는 인간을 죄인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아직 죄인이 아니며 죄인이 되지 않을 수 있는 존재로 보는 새로운 인간론을 제시했다. 이것은 기독교 전통에 대한 도전이었지만, 동시에 인간의 책임과 가능성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