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박진영이 주장하는 이상한(?) 삼위일체(7)
박진영은 초대 교회의 삼위일체 논쟁을 이렇게 정리한다.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아리우스는 성경에 ‘태어나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태어나기 전에는 성자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아리우스를 반박한 니케아 공의회의 교부들은 성자가 처음부터 계셨다는 것을 지키려다, 성경에 분명히 적힌 ‘태어나심’을 덮어 버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질문하면 “묻지 마라”는 식으로 입을 막으며 ‘영원한 태어남’이라는 이상한 개념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영원히 태어나고 있어요. 그 무슨 말이죠?”라고 되묻는다. 결국 아리우스도 교부들도 모두 성경을 잘못 읽었고, 자신만이 그 사이에서 바른 길을 찾았다는 것이다. 양쪽을 모두 비판하는 모습은 균형 잡힌 태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말 니케아는 성경의 ‘태어나심’을 덮었을까? 교부들은 설명할 수 없어서 질문을 막았을까? 그의 설명은 역사적 사실에서도, 신학적 내용에서도 출발부터 어긋나 있다.
첫째, 아리우스 논쟁의 핵심은 단순한 선재 여부가 아니라 성자의 영원한 신성이었다. 아리우스는 성자가 세상과 시간 이전에 존재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나시거나 창조되시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가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성자에게는 시작이 있으나 하나님께는 시작이 없다고 설명한다(테오도레토스, 『교회사』 1.4). 아리우스가 부정한 것은 성육신 이전의 선재가 아니라 성부와 함께 시작 없이 계시는 동영원성과 동일본질이었다.
박진영은 이와 달리 성자가 출생 이전에 성부 안에 혼으로 계셨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어 성부께서 아들을 “본인과 동격으로 올리시고” 일하셨으므로 “그래서 아들도 하나님이구나”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쟁점은 여전히 남는다. 동격으로 높여지기 전에도 성자는 온전한 참 하나님이셨는가? 그렇다면 성부가 동격으로 올렸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설명은 성립하지 않는다. 반대로 높여진 결과로 하나님이라 불리신다면, 그것은 영원한 동일본질이 아니라 부여받은 신적 지위다. 혼의 선재를 인정했다는 사실만으로 성자의 영원한 신성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둘째, 니케아 공의회는 성자의 ‘나심’을 덮지 않고 정면으로 고백했다. 325년 니케아 신경은 성자를 성부에게서 나신 독생자, 곧 성부의 본질에서 나신 분으로 고백한다. 이어 “나셨으나 만들어지지 않으셨으며, 성부와 동일본질이신” 분이라고 선언한다. 니케아 신경 끝에서는 성자가 계시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는 주장을 배격한다. 니케아가 거부한 것은 ‘나심’이 아니라, 그 나심을 피조물의 만들어짐과 같은 것으로 읽는 해석이었다.
여기서 동일본질은 두 사람이 같은 종류의 인간 본성을 지녔다는 뜻과도 다르다. 성부와 성자는 같은 종류의 신성을 각각 소유한 두 하나님이 아니다. 신적 본질은 하나이며 나누어지지 않는다. 성자의 나심도 성부의 일부가 떨어져 나와 별개의 신이 되는 사건이 아니다. 니케아 신앙은 성자의 나심과 영원한 신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지 않는다. 성자는 참으로 성부에게서 나신 아들이시며, 동시에 성부와 동일본질이신 참 하나님이시다.
셋째, 성자의 영원한 나심은 니케아에서 갑자기 만들어 낸 개념이 아니다. 니케아 이전의 오리게네스는 성자의 나심을 태양의 광채에 비유하며 영원한 것으로 설명했다(『원리론』 1.2.4). 아타나시우스도 오리게네스의 글을 인용하여 말씀이 성부와 언제나 함께 계셨다는 고백이 이전부터 전해졌음을 논증했다(『니케아 결의에 관하여』 27). 그보다 앞선 이레네우스 역시 성자가 언제나 성부와 함께 계셨다고 말했다(『이단 논박』 4.20.1, 3). 이들의 신학 전체가 후대의 니케아 신앙과 완전히 같았다는 뜻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성자의 영원성을 설명하는 논의가 니케아 이전부터 있었다는 사실이다.
박진영이 ‘원조’로 내세우는 테르툴리아누스도 전체 문맥에서 읽어야 한다. 그는 “빛이 있으라”는 창조 말씀과 관련하여 말씀의 ‘완전한 출생’을 말한다(『프락세아스 반박』 7). 후대의 정교한 교리 언어로는 주의하여 읽어야 할 표현이다. 그러나 같은 저술에서 성부·성자·성령의 실체와 능력이 하나라고 고백한다(2). 칼빈도 그의 표현에 거칠고 모호한 점이 있지만 하나의 실체와 위격의 구별을 가르쳤다고 설명한다(『기독교강요』 1.13.28). 따라서 그의 일부 표현을 가져와 하나님의 하나 되심을 단순한 뜻과 목적의 일치로 축소할 수는 없다.
넷째, 교부들이 경계한 것은 ‘나심’이 아니라 그 방식을 인간의 출산으로 재단하는 일이었다. 박진영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가 질문자의 입을 막았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가 인용한 『신학강론』 제29편 8절의 질문은 ‘성자가 나셨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나셨는가’이다. 그레고리우스는 나심을 인정하면서, 물질이 흘러나오거나 나뉘는 방식으로 그것을 설명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같은 강론 13절에서는 낳음이 끝나지 않으면 미완성 아니냐는 반론까지 검토한다. 제31편 8절도 직접적으로는 성령의 ‘나오심’을 다룬다.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오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시한 뒤, 그 방식을 인간이 남김없이 해명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경계한 것이다.
그의 논쟁 문체가 날카로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심의 방식을 다 설명할 수 없다는 말과, 나심 자체를 덮었다는 주장은 다르다. 오히려 박진영은 성자의 혼이 성부 안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면서 ‘하늘 재질의 몸’을 받았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성경의 나심을 고백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방식을 내부와 외부, 혼과 몸의 결합으로 규정한 것이다. 교부들이 경계했던 인간적 발생의 틀을 하나님의 나심에 다시 적용하고 있는 셈이다.
‘영원한 나심’은 출산이 끝나지 않고 영원히 진행된다는 뜻이 아니다. 성자가 미완성 상태에서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는 뜻도 아니다. 성자는 언제나 온전한 참 하나님이시면서, 언제나 성부에게서 나신 아들이시다. 단지 오래전부터 함께 계셨다는 것이 아니라, 시작 없이 성부에게서 나신 아들로 계신다는 고백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창세 전의 영광과 성부의 사랑도 이 영원한 관계를 증언한다(요 17:5, 24). 인간의 출생에 시작이 있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나심에도 시작을 요구할 수는 없다.
다섯째, 성육신하신 성자의 낮아지심을 영원한 신성의 열등함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요 14:28)는 말씀은 성자가 덜 하나님이시라는 뜻이 아니다. 칼빈은 이를 성자가 육체로 오셔서 영광을 감추신 중보자의 자리에서 하신 말씀으로 설명한다(『기독교강요』 1.13.26). 성경은 성자의 온전한 신성을 고백하면서, 동시에 그분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낮추셨음을 증언한다.
“아들도 모르고”(막 13:32)라는 말씀도 단순히 모르는 척하셨다는 식으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 칼빈은 이 본문을 함께 다루는 마태복음 24:36 주석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인간으로서는 그날을 알지 못하셨다고 설명한다. 신성과 인성이 한 위격 안에 연합되어도 각 본성의 고유성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두 성자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동일한 한 성자께서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라는 뜻이다. 성자의 인간적 한계와 중보자로서의 순종은 신성의 결함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위해 참 사람이 되셨다는 복음의 증언이다.
교부들이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설명이 옳아지는 것은 아니다. 개혁신학은 공의회와 교부들의 의견도 성경 아래에서 검토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0). 그러나 그들을 비판하려면 먼저 그들이 실제로 무엇을 고백했는지 정확히 읽어야 한다. 니케아는 성자의 나심을 숨기지 않았고, 영원한 나심은 끝나지 않는 출산을 뜻하지 않는다. 니케아가 버린 것은 성자의 ‘나심’이 아니라, ‘나심’을 존재의 시작과 피조됨으로 바꾸어 읽는 해석이었다. 양쪽을 모두 비판한다고 그 사이에 바른 길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바른 길은 성경의 어느 한 증언도 희생하지 않는 데 있다. 다음 호에서는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므로 구별된 위격이 아니라는 그의 일곱 번째 주장을 살펴보겠다.
*오리게네스, 『원리론』(아카넷, 2014) / 이레네우스, 『이단 논박 1~5』(분도출판사, 2017~2022) / 테르툴리아누스, 『프락세아스 반박』(분도출판사, 2015) /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신학강론』(분도출판사, 2022) 등은 국내에 완역되었으나 국내 단행본으로 완역되지 않은 테오도레토스의 『교회사』(1.4)와 아타나시우스의 『니케아 결의에 관하여』(27)는 『기독교 문서 자료집』(헨리 베텐슨 편) 등 국내 번역 사료집과 영문 교부 문헌 총서(NPNF 제2시리즈 3권, 4권)를 참조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