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Resilence (거룩한 회복탄력성)
위대한 하나남의 사람들에겐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쁨’이었다. 16세기 영국의 재상이었던 토머스 모어는 국왕 헨리 8세의 이혼 승인을 거부하다가 사형을 당했다. 그는 단두대의 형장 계단을 올라가며 사형집행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올라가는 것 좀 도와주게나. 내려올 땐 혼자 할테니.” 그런가하면, 초대 교회의 순교자 라우렌시오는 모진 고문 끝에 순교를 당했는데, 그가 불로 짖임을 당하는 고문을 받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보게, 이쪽은 잘 구워졌으니 이제 반대쪽을…..” 그들이 누렸던 기쁨은 ‘빼앗길 수 없는 기쁨’이었다.
그리스도인은 기쁨의 영이신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들이기에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다. C.S.루이스는 그의 책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그리스도인들은 속으로는 영락없는 쾌락주의자야. 금식이니 철야기도니 화형대니 십자가니 그런 건 겉모습일 뿐이야. 아니면 바닷가에 밀려드는 물거품 같은 것이거나. 원수의 심연에는 훨씬 더 많은 즐거움, 쾌락이 있다. 원수도 이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지. 그 작자 우편에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고 하지 않더냐.” 그렇다. 그리스도인의 동의어는 쾌락주의자다.
철학자들은 고대인들과 현대인들은 삶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고 지적한다. 고대인들은 고통을 인생에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반면에, 현대인들은 고통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고통의 문제를 만날 때마다 이렇게 외친다. “Why Me?” 내 인생에 이런 고통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절규다. 그러나 고통이 면제되는 인생이란 없다. 예수 믿는 인생도 다르지 않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벧전 4:12)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들에게도 불 같은 시험이 찾아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란 것이다. 믿는 자던 믿지 않는 자던 모든 삶엔 고통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 Resilience! 회복탄력성이다.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안 넘어지는 것도 아니고, 안 아파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넘어져서 아파도 춤을 추며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능력이요, 고통 중에 분명 힘들지만 그럼에도 기뻐할 수 있는 힘이다.
찬송가 486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2절 가사는 이렇다. “이 세상에 곤고한 일이 많고 참 쉬는 날 없었구나” 삶은 분명 힘들다는 것이다. 하지만 후렴가사가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이것이다. “주 예수의 구원의 은혜로 다 참 기쁘고 즐겁구나. 그 은혜를 영원히 누리겠네…..” 부활하신 주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신다. 아버지의 사랑은 끝이 없다. 그래서 고통 중에도 우리는 춤추며 일어날 수 있다. Holy Resilience!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참된 능력이다.
-Fullerton 나들목비전교회 권도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