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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 언약의 특징으로서 하나님의 전신갑주

언약의 특징으로서 하나님의 전신갑주

사도 바울은 이 땅에서 영적 전쟁을 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허리에 진리의 띠를 매는 것과 하나님의 의로움의 가슴막이를 하는 것을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중요한 원칙으로 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특징들은 성도가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속량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어졌다는 믿음의 확신 가운데에서 시작되어집니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세 번째 특징인 평화의 복음을 준비하는 신발을 신는 것과, 네 번째 특징인 믿음의 방패를 드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기초 위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엡 6:15) 그리고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준비하는 신발을 신고, (16) 이 모든 것에 더하여 믿음의 방패를 들어 그것으로 악한 사람의 모든 불화살들을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Translated by YG Kim)

바울은 신발의 이미지를 통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세 번째 특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엡 6:15). 먼저 우리들은 성경에서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barefoot)이 어떠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 맨발은 굴욕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자들은 신발을 빼앗겼고(대하 28:15), 심지어 벌거벗겨져 굴욕을 당하는 모습이었습니다(겔 16:39; 호 2:3; 미 1:8). 또한,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갈 때에 맨발로 도망가는 모습은 다급함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왕국이 일시적으로 압살롬에게 굴욕을 당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삼하 15:30).

둘째로, 맨발은 교육을 받지 못해 통제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우상을 섬기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막의 야생 암나귀에 비유를 합니다. 그 야생 암나귀는 발정이 나서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는 모습으로 그 모습은 편자(horseshoe)를 박지 않은 나귀의 상태입니다(렘 2:23-25).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도 신발을 신지 않은 모습은 통제가 불가능한 모습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와 반대로, 맨발이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이 될 때도 있습니다.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는 모습은 그 땅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출 3:5; 수 5:15). 그러므로 대제사장과 그의 아들들은 회막에 들어갈 때에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발을 씻고 들어가야 죽음을 면할 수 있습니다(출 30:19-21).

이와 반대로 신발을 신는 행동도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성경에서 신발을 신는 것은 자신이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라는 신분을 표현합니다. 아모스 시대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시는데 그들은 신발 한 켤레의 값을 받고 가난한 노예를 사고 팔았습니다(암 2:6; 8:6). 그러므로 사람들이 부의 상징으로 신발을 신는 것은 자신이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눅 15:22).

둘째, 성경에서 신발을 신는 행동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는 모습 가운데에서도 신발을 신는 행동은 강조 되었습니다(출 12:11).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섯 가지 들포도의 열매(사 5:8-23)를 맺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열방의 군대들을 부르십니다. 열방의 군대들의 모습도 허리띠를 매고 신발끈을 매는 행동을 통하여 전쟁이 준비되었음을 상징합니다(사 5:27). 예수님께서도 열두 제자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압하는 권능을 주시고 두 명씩 6개의 조로 나누어서 전도 여행을 보내실 때에 제자들이 신발을 신는 행동은 복음 전파를 위해 준비되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막 6:9).

이러한 의미를 종합해 보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은 성도들이 평화의 복음을 준비하는 신발을 신는 다는 것은 더 이상 죄의 종 노릇을 하는 노예의 삶이나 복음을 듣지 못해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죄의 종에서 자유를 얻어 하나님의 의의 종이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준비되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평화의 복음(the gospel of peace)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에베소서의 성도들에게 ‘진리의 말씀’(the word of truth)의 동격으로 ‘구원의 복음’(the gospel of salvation)을 언급하고 있습니다(엡 1:13). ‘복음’(euangelion: gospel)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전쟁에서 승리의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의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역(LXX) 성경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화살을 맞은 사울이 스스로의 목숨을 끊고 죽은 상태로 발견이 되었을 때에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과 백성들에게 승리의 소식을 전하는데 이 때에 사용이 되어지는 동사가 ‘유앙겔리조’(euangelizo)로 ‘좋은 소식을 선포하다’(to announce good news)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동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다’라는 의미로 확장되어서 구약 성경에서 사용이 되었고(사 60:6; 시 67:12),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적 전쟁에서 승리의 소식을 전하는 의미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구원 계획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복음의 소식이 구원의 소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원의 소식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평화(eirene: peace)의 복음입니다. 우리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평화’라는 헬라어와 가장 근접한 구약의 히브리어 명사는 ‘샬롬’(salom)입니다. 그리고 이 명사는 하나님과 아브람이 언약을 맺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처음 사용이 되어집니다(창 15:15). 이러한 의미에서 ‘샬롬’은 언약의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히 9:15; 12:24) 안에서 주어진 ‘평화의 복음’을 준비하는 신발을 신은 성도들은 언약의 하나님을 굳건히 붙잡고, 마귀의 공격이나 속임수에도 두려워하거나 속지 말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은 성도들로 굳건히 서야 합니다.

바울이 언급하는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네 번째 특징은 믿음의 방패를 들어 악한 사람의 모든 불화살을 방어하는 모습입니다(엡 6:16). 먼저 바울은 ‘이 모든 것에 더하여’라고 언급합니다. ‘이 모든 것에 더하여’라는 헬라어 번역은 ‘모든 일에’(en pasin)라는 헬라어 전치사의 의역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왜 ‘모든 일에’라는 헬라어 구문을 ‘이 모든 것에 더하여’라고 번역을 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바울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가는 과정에서 ‘엔 파신’(en pasin)이라는 전치사 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허리 띠를 매고, 의로움의 가슴막이를 하고 있는 성도들이 평화의 복음을 준비하는 신발을 신고 ‘이 모든 것에 더하여’ ‘믿음의 방패’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의 방패’란 무엇입니까?

먼저 우리들은 방패(thyreos: shield)에 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방패란 공격의 수단이 아니라 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에서 군인은 방패를 자유롭게 움직여서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적군의 공격은 일반적인 화살이 아니라 모든 불화살(all the flaming arrows)에 의한 집단적인 공격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공격에서 군인이 자신의 목숨을 방패 하나에 의존해서 보호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바울이 언급하는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믿음의 방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욱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15장 1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면서 아브람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은 아브람의 방패(magen: shield)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더 이상 두려움 가운데에서 살아가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샬롬’을 언약의 용어로 생각해 보았다면, ‘방패’ 또한 언약의 용어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3P로 정리해 볼 수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약속(promise)과 공급하심(provision)과 보호하심(protection)입니다. 특별히 ‘방패’는 하나님의 보호하심(protection)을 상징하는 단어로, 전쟁에서 일반적인 방패는 적군의 공격에서 군인을 보호하는데 한계가 있지만, 언약의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 성도들의 방패는 모든 공격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역(LXX) 성경을 보면 창세기 15장 1절의 ‘방패”(magen)라는 히브리어 명사를 단순히 ‘방패’(thyreos)라는 헬라어 명사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방패에 의해 보호되어지는 모습으로 ‘휘파스피디오스’(hypaspidios: covered with a shield)라는 명사로 번역을 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더 이상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서 방패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방패지기(shield-bearer)가 되어 주셔서 아브람을 보호해 주십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믿음의 방패’를 생각해 보면, 에베소서 1장 3-14절에 기록되어져 있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믿는 성도들이 믿음의 방패를 들었을 때에 그들은 단순히 방패를 든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방패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방패는 악한 사람의 불화살의 공격으로부터 성도들을 온전히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악한 사람’(evil one)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악한 사람’을 복수(plural)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단수(singular)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언급하고 있는 에베소서 6장 10-20절의 말씀에서 ‘악한 사람’은 11절에서 단수로 기록되어 있는 마귀(diabolos: devil)입니다. 그리고 12절의 말씀에서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움의 세상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의 주인인 마귀는 영적 전쟁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있는 성도들을 불화살들로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방패는 마귀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시킵니다.

<함께 나누기>

  1.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세 번째 특징은 신발과 연결되어져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과 신발을 신은 상태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특징으로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과 신발을 신는 모습은 어떠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김윤규 목사 (토론토 쉴만한물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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