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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 이혼에 관한 생명 존중의 원칙

이혼에 관한 생명 존중의 원칙

참된 제자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유대지역에서 이혼과 관련된 바리새인들의 질문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 수난 예고(막 9:30-32) 이후에 가버나움에 위치한 집 안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막 9:33-50).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 집에서 나와 요단강 건너편을 지나 유대 지역으로 향하셨고(막 10:1), 바리새인들의 질문을 통해 이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이어집니다(막 10:2-9). 이러한 배경에서 보면, 마가복음 8장 27절부터 시작된 길 위에서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10:1-9절에서 일반 대중으로 넓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참된 제자도와 관련된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적인 공간인 집에서 다시 이루어집니다(막 10:10-12).

예수님과 제자들은 가버나움 집에서 나와 유대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당시 유대는 이스라엘의 정치, 경제, 문화와 종교의 중심지로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막 10:1) 그리고 그(예수)가 그곳에서 일어나 유대 지방과 그리고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그러자 다시 큰 무리가 그(예수)에게 함께 갔습니다. 그리고 이전처럼 그(예수)는 다시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Translated by YG Kim)

우리가 마가복음 10장 1절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유대 지방을 거쳐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신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유대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막 14:1). 이러한 배경으로 생각해 보면, 마가는 행선지를 기록할 때 최종 목적지를 먼저 기록하고 경유지를 그 다음에 기록하는 독특한 문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막 11:1). 결과적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요단강 건너편을 지나 유대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구약 성경의 배경으로 생각해 보면 요단강 건너편은 서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요단강 동쪽을 가리킵니다(민 34:15; 수 1:14; 사 9:1).

마가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왜 요단강 건너편인 동쪽을 지나 유대로 향하고 있는 구체적인 이유를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갈릴리 사람들이 유대로 향하는 일반적인 경로인 서쪽을 택하지 않고 동쪽을 경유해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대로 내려가신 이유를 요단강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방인 지역인 사마리아 지역을 피하기 위해서 요단강 동편을 통해 유대로 가셨다고 주장합니다(For instance, Robert H. Gundry, Mark: A Commentary on His Apology for the Cross, Eerdmans, 1993, p. 529). 그러나 마가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이미 두로와 시돈과 같은 이방인 지역을 아무런 종교적 편향성 없이 방문하셨고, 그 곳에 살고 있는 시리아-페니키아 출신의 이방인 여인의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막 7:24-30). 따라서 예수님께서 요단강 서편에 위치하고 있는 사마리아 지역을 피하기 위해서 요단강 동편을 통해 유대로 향하셨다는 의견은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요단강 동편 베뢰아(Perea) 지역을 통과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동편을 통해 가나안 땅으로 나아가는 출애굽의 여정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길 위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대로 향하는 경로가 요단강 동편 출애굽의 여정을 따르고 있다면, 이것은 마가가 단순히 지리적 이동 정보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아 ‘새 출애굽’(New Exodus)의 역사를 기록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맥적 연결 고리에서 이혼에 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모세를 언급하시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전처럼 다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는 무리들을 가르치고 계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이혼에 관하여 질문하였습니다.

(막 10:2)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가까이 와서 그(예수)를 시험하기 위해서 질문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 (3) 그러자 그(예수)가 그들에게 대답하고자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너희들에게 어떻게 명령했느냐?” (4) 그러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고 [아내를] 내보내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5)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마음의 완악함을 참고하여, 그(모세)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기록했다. (6) 그러나 창조의 시작부터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만드셨고 (7)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서 [그리고 그의 아내와 연합되어서, (8) 그리고 둘은 한 몸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둘은 더 이상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다. (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함께 얽어매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 (Translated by YG Kim)

마가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의 목적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막 10:2a). 마가복음에서 ‘시험하다’(peirazo: to test)라는 동사가 예수님께 사용이 되어질 때, 그 의미는 적대적인 의도로 예수님을 검증하거나 유혹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막 1:13; 10:2; 12:15). 이러한 의미에서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예수님께 ‘올무’(skandalon: trap)를 놓는 행위로 마가복음 9:42-48절에서 반복되어지는 ‘실족하게 하다’(skandalizo: to cause to stumble)라는 동사와 연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막 10:2b)라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이혼과 관련된 모세의 율법의 권위를 통하여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는 것입니다. 

둘째, 갈릴리와 페레아 지역을 다스리는 분봉왕(tetrarch)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 BC 4-AD39년 재위)가 자신의 아내를 버리고 자신의 형제인 빌립(Philip)의 아내 헤로디아(Herodias)와 재혼을 한 사건(막 6:17-20)과 연결하여서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재혼에 관한 확고한 금지 명령을 언급하신다고 하면, 예수님을 향한 헤롯 안티파스의 분노를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 문화 가운데에서 이혼할 수 있는 권리는 남자에게만 있었습니다. 요세푸스(Josephus)의 유대 고대사(Jewish Antiquities)의 15권 7장 10(§259)을 보면,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의 여동생 살로메(Salome)가 그녀의 남편 코스토바루스(Costobarus)에게 이혼을 요구합니다. 이 이혼 사건을 언급하면서 요세푸스는 당시 유대인들의 법에서 이혼의 권리는 남편에게만 있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헤롯 안티파스가 헤로디아와 재혼해서 얻은 의붓딸(stepdaughter) 살로메는 동명이인으로 다른 인물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모세는 너희들에게 어떻게 명령했느냐?”라고 역질문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논쟁 상대방에게 반문(counterquestion)을 던지는 것은 흔한 랍비적 논쟁 기술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이혼이 허용되는지에 관한 바리새인들의 관심사와 달리 모세의 명령이 무엇에 초점을 두고 있는지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24장 1절을 인용하여 율법이 이혼을 허용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려 했지만 (10:4),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인간의 죄악에 대한 임시적인 조치로 이혼을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막 10:5).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마음의 완악함”(sklerokardia: hardness of heart)이란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는 행동으로 ‘완고함’(stubbornness)을 의미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부하는 근본적인 죄의 상태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 그들에게 이혼 증서를 써주는 것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타락 전(창 3장)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결혼 제도의 순수함을 통하여 하나됨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내와 남편이 한 몸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하나되게 하시는 모습은 마치 멍에(yoke)로 남편과 아내를 함께 얽어 매시는 모습입니다(syzeugnymi: to yoke together). 따라서 결혼 제도는 단순히 상호 편의에 의한 계약(contract)이 아니라 존재론적 지위(ontological status)를 가지는 영구적인 연합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결혼 제도를 사람의 결정으로 나누는 것을 금지하십니다(막 10:9).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서 허용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셨던 결혼 제도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혼에 관한 참된 제자도와 관련된 예수님의 가르침은 마가복음에서 사적인 교육의 장소인 집에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유대적 견해와 율법적 해석과는 너무나도 다르고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사적인 공간인 집에서 다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막 10:10) 그리고 집으로 [들어갔을 때], 제자들이 다시 이것에 관하여 그(예수)에게 질문하였습니다. (11) 그리고 그(예수)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그의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그는] 그녀(아내)에게 간음하는 것이다. (12) 그리고 만일 그녀(아내)도 그녀의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 간음하는 것이다.” (Translated by YG Kim)

예수님께서는 결혼 후 자신의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재혼하는 것을 간음(adultery)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전통적인 유대 사회에서 간음은 가정을 이룬 다른 남자에 대한 침해로 보았기 때문에, 남편에게는 자신의 아내를 향한 간음죄가 적용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내에게도 동일한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시며, 남편이 다른 여성과 관계를 맺는 것도 간음에 해당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혼에 관한 동일한 본문을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 5장 32절을 근거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음행을 제외하고 이혼에 관하여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당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한 여인이 음행의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로 이혼을 당한다고 하면 이 여인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혼의 타당성은 한 여인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인권 보호가 바탕에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에 적용하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혼의 이유는 부부간의 성격차이로 인한 불화, 음행, 경제문제, 가정 폭력, 건강문제 등이 있습니다. 만일 한 가정에서 음행의 문제가 아닌 다른 문제로 이혼을 한다고 하면 우리는 이혼을 찬성해야 합니까?

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느 목사님에게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젊은 여자 성도님이 이혼에 관하여 상담하였을 때, 목사님은 음행의 문제가 아니면 참고 살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 성도님은 더 이상의 가정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자녀들을 남기고 세상을 등졌습니다. 만일 목사님이 여자 성도님에게 이혼을 권면해 드렸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에 위반되는 것입니까? 생명보다 결혼 제도를 유지하는 것이 더 소중합니까? 우리들은 이러한 상황에 어떠한 답변을 제시할 수 있습니까?

<함께 나누기>

  1. 예수님과 제자들이 요단강 동편을 지나 유대로 향하고 있는 이유은 무엇입니까? ‘새 출애굽’과 관련해서 설명해 보십시오.
  1.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막 10:2b)라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의 두 가지 목적은 무엇입니까?
  1.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이혼과 관련해서 역질문을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신명기 24:1-4절의 말씀을 먼저 읽고, 모세가 이혼을 허용한 이유를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설명해 보십시오.
  1.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마음의 완악함’이란 무엇입니까?
  1.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타락 전 결혼 제도의 순수함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는 모습은 어떠한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습니까?(막 10:9)
  1. 우리는 이혼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음행의 문제를 제외하고 이혼을 금하신 본질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복음에 빚진 자 김윤규 목사 (토론토 쉴만한물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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