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시간에 속에서 깨어 있는 성도
마가복음 13장 5b-37절의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메시지 가운데에서 33-37절은 수사학적 에필로그(Epilogue)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주적 종말론의 시간과 때를 ‘아버지를 제외한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알지 못한다’(막 13:32)는 선포를 통해 우주적 종말론을 준비하는 성도들의 실존적 삶의 태도로 ‘깨어 있음’(watchfulness)을 강조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종말의 메시지에서 ‘깨어 있음’의 주제는 14-15장의 예수님의 수난 내러티브(Passion Narrative)와 연결되는 해석학적 다리(Hermeneutical bridge)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주적 종말론의 시간과 때를 알지 못하는 불확실성 가운데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의 원칙으로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이 두 동사는 헬라어 연결 접속사 ‘카이’(kai: and)로 연결되지 않고, ‘콤마’로 연결된 접속사 생략(Asyndeton) 구조입니다. 이러한 헬라적 표현은 종말을 준비하는 성도들에게 긴장감을 극대화시킵니다.
(막 13: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왜냐하면 너희들은 그 정하신 시간이 언제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Translated by YG Kim)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마지막 메시지는 ‘주의하라’라는 헬라어 동사 ‘브레포’(blepo)로 시작합니다. 이 동사는 마가복음 13장의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메시지 가운데에서 5절, 9절, 23절, 33절의 예수님의 말씀의 시작 부분에 기록되어 성도들이 역사 속에서 환난과 거짓 메시아들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시각적, 영적 경각심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이 종말을 대하는 올바른 실존적 태도로 깨어 있는 삶을 제시합니다. 마가복음 13장 33-37절에는 ‘깨어 있으라’라는 헬라어 동사가 세번 사용되는데, 33절에 기록된 동사와 35절과 37절에서 기록된 동사는 각각 다릅니다. 따라서 우리가 헬라어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에는 ‘깨어 있으라’라는 두 가지 동사를 하나의 의미로 번역하지만, 헬라적 개념에서는 각각 동사의 의미가 미묘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33절에 기록되어 있는 ‘깨어 있으라’라는 헬라어 동사는 ‘아그르푸네오’(agrypneo)입니다. ‘아그르푸네오’는 어원적으로 분석해 보면, ‘잠’이라는 명사 ‘휘푸노스’(hypnos)와 ‘쫓아내다, 사냥하다’라는 동사 ‘아그루오’(agreuo)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동사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잠을 쫓아내다” 또는 “잠들지 않고 밤을 세워 사냥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의미가 신약 성경에서는 영적으로 잠을 자지 않고 경계하는 상태를 강조하는 동사로 사용되었습니다(눅 21:36; 히 13:17; 엡 6:18). 따라서 예수님께서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첫 번째 ‘깨어 있으라’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성도들에게 단순한 육체적 불면(sleeplessness)을 강조하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잠들지 않고 깨어 있어 종말의 시각에 관한 잘못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영적 분별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종말의 시간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를 예수님께서는 “왜냐하면 너희들은 그 정하신 시간이 언제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32절에서 우주적 종말론의 그 날과 그 시간에 관하여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알지 못한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재림의 시각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영적 나태나 방관의 이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도가 매 순간 깨어 있어 자신의 직무와 제자도의 삶을 신실하게 감당해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재림의 날짜와 시간을 알지 못하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실존적 깨어 있음의 자세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 타국으로 떠나는 주인에게 사명을 위임받은 ‘문지기 비유’(Parable of the Doorkeeper)를 말씀하십니다.
(막 13:34) 마치 자신의 집을 떠나 멀리 여행을 가는 사람이 자신의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 사람에게 자기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령한 것과 같다. (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왜냐하면 너희들은 집 주인이 언제 올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녁일지, 한 밤중일지, 닭 울 때일지, 새벽일지 [알지 못한다.] (36) 그(주인)가 갑자기 와서 너희들이 잠자는 것을 발견하지 않도록 하라. (Translated by YG Kim)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문지기의 비유’에서는 집을 떠나 타국으로 길을 떠나는 주인이 자신의 종들에게 각각의 권한을 주어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령합니다(막 13:34). 이 비유의 상징적인 의미를 생각해 보면, 타국으로 떠난 집 주인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 장차 영광 중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집에서 사명을 맡은 종들과 문지기는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제자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주인이 집을 떠나며 종들에게 각자의 권한(exousia: authority)과 고유한 직무(ergon: work)를 위임하는 모습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의 공동체가 어떠한 삶의 자세로 이 땅을 살아가야 하는지 삶의 기준을 명백하게 제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문지기 비유’에서 주인이 종들에게 부여한 ‘권한’과 ‘일’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습니까?
먼저, 주인이 종들과 문지기에게 위임한 권한은 단순한 세상적 지배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 사역 동안 보이셨던 선교 사역을 교회가 계속해서 수행할 수 있도록 부여하신 영적 자격과 권능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영적 어둠을 몰아낼 권한을 나누어 주셨습니다(막 3:14-15; 6:7, 12-13). 따라서 교회가 가진 권한은 세상의 군주들처럼 타인을 압제하는 권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고 영적 싸움을 감당하는 섬김의 권능입니다.
더 나아가서, 주인이 각각의 종에게 맡긴 ‘일’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위임된 고유한 선교적 사명과 제자도적 삶의 과업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삶은 수동적 방관이나 재림의 날짜를 계산하는 나태함이 아니라,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각자에게 맡겨진 삶의 자리에서 신실하게 복음을 증거하는 능동적 삶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3장 35절과 37절에서 기록된 두 번째 ‘깨어 있으라’라는 헬라어 동사는 ‘그레고레오’(gregoreo)입니다. 이 동사는 의미론적·형태론적 연장선상에서 ‘깨우다, 일으키다, 일어서게 하다’라는 동사 ‘에게이로’(egeiro)와 깊이 연결됩니다. 특별히 ‘그레고레오’는 ‘에게이로’의 능동 완료 형태인 ‘에그레고라’(egregora)의 어간에서 새롭게 파생되어 ‘그레고레오’라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동사의 의미는 단순히 잠에서 깨어나는 사건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잠에서 깨어남을 스스로 인식하고 사명의 자리에 일어서 있는 상태를 지속하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35절의 ‘깨어 있으라’라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성도가 외부의 환경에 피동적으로 끌려가는 수동(passive)의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자발적이고 능동적(active)으로 영적 경계태세를 유지하는 거룩한 문지기의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문지기 비유’를 통해 종들과 문지기가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를 선포하시는데, 그 핵심은 바로 타국으로 떠난 집 주인이 언제 올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알지 못하는 불확실성을 강조하시기 위해, 고대 로마 군대의 4분법으로 나누어진 경비 시스템을 반영하여 주인이 돌아올 시점을 ‘저녁’(opse; 저녁 6-9시), ‘한밤중’(mesonyktion; 밤 9-12시), ‘닭 울 때’(alektorophōnia; 밤 12-새벽 3시), 그리고 ‘새벽’(proi; 새벽 3-6시)의 네 경점(更點)으로 나누어 구체화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인이 돌아오는 시점을 안전한 한낮의 시점이 아니라, 위험한 밤 시간으로 언급하신 이유는 우주적 종말론에서 예수님의 파루시아(Parousia)가 불시에, 특별히 세상의 어둠이 가장 깊은 순간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마가복음 13장 35절의 네 경점은 예수님의 종말론적 예언이 단순히 미래의 우주적 종말론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14-15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수난 내러티브에서 제자들이 깨어 있지 못하는 실존적 실패를 드러내는 해석학적 다리(Hermeneutical bridge)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36절에서 “그(주인)가 갑자기 와서 너희들이 잠자는 것을 발견하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14-15장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의 밤이 지나가는 네 경점에서 잠들고, 도망치고, 부인하는 비극적 실패를 보여줍니다.
첫 번째 경점인 제 1경(저녁 6-9시)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 자리에 앉으십니다(막 14:17). 이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유다가 자신을 배반할 것과(막 14:18), 제자들이 모두 자신을 버리고 흩어질 것과(막 14:27), 베드로가 세 번 자신을 부인할 것을 예언하십니다(막 14:30). 밤의 시작을 알리는 제 1경부터 제자 공동체 내부에는 이미 영적 긴장과 배반의 균열이 시작됩니다.
두 번째 경점인 제 2경(밤 9-12시)은 마가복음 14장 32-50절에 기록된 겟세마네 동산의 사건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gregoreite)”(막 14:34)라고 엄히 명하셨으나, 기도 후 돌아오셨을 때 제자들은 세 번이나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께서 문지기 비유에서 “그(주인)가 갑자기 와서 너희들이 잠자는 것을 발견하지 않도록 하라”(막 13:36)는 경고가 그대로 실현된 실패입니다. 곧이어 한밤중에 유다와 무장한 무리가 들이닥칠 때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14:50).
세 번째 경점인 제 3경(밤 12-새벽 3시)은 대제사장의 뜰 아래에서 벌어진 베드로의 신문 장면과 연결됩니다(막 14:66-72).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여종과 구경꾼들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완강히 부인하고 맹세하며 저주합니다. 제3경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가 두 번째 울리자(alektōr),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막 14:30)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밖으로 나가 통곡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 경점인 제 4경(새벽 3-6시)은 마가복음 15장 1절의 “새벽에” 공회가 모여 예수님을 결박하여 빌라도 총독에게 넘기는 장면과 연결됩니다. 동이 터오는 새벽에 예수님 곁에 남아 있는 제자는 단 한 명도 없었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완전한 부재와 실패 속에서 홀로 이방인의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마가복음 13장 37절은 예수님의 종말론에 관한 가르침 전체를 마감하는 최종 결론이자 수사학적 에필로그(Epilogue)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메시지가 올리브 산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있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 속에서 모든 세대의 교회와 독자들에게 적용됨을 확장해서 선포하십니다.
(막 13:37) 그리고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깨어 있으라.” (Translated by YG Kim)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는 것은” 단순히 34-36절에 기록되어 있는 ‘문지기 비유’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마가복음 13장 5b-36절에 기록된 종말론적 유혹에 관한 경고, 성전 파괴, 대환난과 인자의 우주적 재림, 그리고 무화과 나무의 비유와 문지기 비유를 모두 포함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다”는 말씀을 통해 올리브 산 위에서 자신의 종말론적 메시지를 직접 듣는 첫 번째 청중이 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에게, 이 종말론적 메시지를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증거하고 지키는 보편적 선포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그 사명의 마지막 말씀은 “깨어 있으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13장 35절에서 “깨어 있으라”(gregoreo)는 의미를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자발적이고 능동적(active)으로 영적 경계태세를 유지하는 거룩한 문지기의 모습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깨어 있음의 상태는 단순히 네 명의 제자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모든 성도들과 교회들에 적용됩니다.
인자의 재림의 날짜와 시간을 알지 못하는 불확실성은 성도들로 하여금 역사의 방관자나 종말론적 나태에 빠진 자로 만드는 계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 우주의 심판자로 다시 오실 인자를 기다리며 늘 깨어 있도록 촉구하는 실존적 동기가 됩니다. 이러한 깨어 있는 삶은, 우리 각자가 일상의 선교적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를 신실하게 수행하는 삶입니다.
<함께 나누기>
- 마가복음 13장 33절에 기록된 ‘깨어 있으라’라는 헬라어 동사 ‘아그르푸네오’의 의미를 설명해 보십시오.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영적으로 잠들지 않고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문지기 비유’의 상징적 의미를 설명해 보십시오.
- ‘문지기 비유’에서 주인이 종들에게 부여한 ‘권한’과 ‘일’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습니까?
- 마가복음 13장 35절과 37절에서 기록된 두 번째 ‘깨어 있으라’라는 헬라어 동사는 ‘그레고레오’의 의미를 설명해 보십시오.
- 예수님께서 ‘문지기 비유’에거 주인이 언제 올지 알지 못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네 경점을 강조하십니다. 네 경점을 설명해 보고, 마가복음 14-15장과 연결해서 ‘깨어 있음’의 주제가 어떻게 예수님의 종말론적 메시지와 연결되는지 설명해 보십시오.
- 예수님께서 종말의 메시지를 네 명의 제자들에게만 한정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확장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복음에 빚진 자 김윤규 목사 (토론토 쉴만한물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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