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AI 시대, 교회는
주일 예배가 끝난 뒤, 로비 한쪽에서 한 청년이 오래 서 있었다. 사람들이 인사를 나누고, 아이들은 복도 끝까지 달려가고, 커피 향이 잠깐 남았다가 사라지는 그 틈에, 그는 마치 “말을 꺼낼 때”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처음 오셨어요?”라고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설명이 안 되는 일이 있었어요.”
대개 이런 말은 ‘이유’를 묻는 질문을 불러온다. 무슨 일이었는지, 왜 그랬는지, 언제부터였는지. 하지만 그날 나는 습관처럼 캐묻지 않기로 했다. 대신 한 문장만 더 얹었다. “그 일, 천천히 들려주셔도 괜찮아요.”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교회랑 상관없는 사람이었어요. 근데 며칠 전에… 잠이 안 와서 그냥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떠올렸거든요. 그랬더니, 마음이 갑자기 가라앉았어요. 누가 제 가슴을 눌러주듯이요. 그리고… 울었어요. 이유 없이. 그게 너무 무서워서… 그러고는 여기로 왔어요.”
설명할 수 없는 은혜는 종종 이렇게 온다. 논증을 통과하지 않고, 강의를 듣지 않고, 기도 훈련을 마치지 않고도, 사람의 마음 한복판에 “낯선 평안”을 떨어뜨린다.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은 논리의 사다리로 오시고,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은 “장면”으로 오신다. 문은 다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문을 들어온 사람을 우리가 어디로 데려가느냐이다.
이 시대의 영적 개방성
요즘은 무신론이 완전히 승리한 시대처럼 보이기도 하고, 동시에 이상할 만큼 영적인 시대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종교를 떠났다고 말하면서도, 마음의 빈칸을 그냥 두지 못한다. 누군가는 명상으로, 누군가는 운세로, 누군가는 혼합 영성의 작은 의식으로 그 빈칸을 채우려 한다. 2회에서 말했듯, 갈급함은 언제나 방향을 찾는다. 방향을 못 찾으면 아무 데로나 흐른다. 그런데 또 한편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여기에서 교회는 두 개의 습관적인 반응으로 쉽게 미끄러진다.
하나는 너무 빨리 정리하려는 반응이다.
다른 하나는 너무 쉽게 신비화하려는 반응이다. 둘 다 사람을 살리기 어렵다. 정리는 관계를 닫고, 신비화는 중심을 흐린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정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를 복음으로 읽어주는 사람, 해석가” 이다.
우리가 말하는 해석가는 ‘특별한 직함’이 아니다. 해석가는 공동체의 습관이고, 관계의 태도다. 해석가는 이렇게 한다.
먼저 듣는다. (결론을 내리기 전에, 그 사람이 “무엇을 겪었는지” 끝까지 듣는다.)
그다음 묻는다. (경험을 평가하기보다, 경험이 남긴 마음을 묻는다.)
그리고 복음의 큰 이야기 안으로 초대한다. (경험이 복음의 중심으로 자리를 옮기게 한다.)
마지막으로 삶의 습관으로 연결한다. (일회성 사건이 168시간의 신앙이 되도록 길을 만든다.)
이 청년에게도 나는 비슷하게 물었다.
“그 평안이 온 뒤에, 당신이 더 사랑하게 되었나요? 더 정직해졌나요? 누군가를 미워하던 마음이 조금이라도 느슨해졌나요? 아니면 더 고립되고 더 두려워졌나요?” 경험의 진위를 단번에 판정하려 하지 않고, 열매를 함께 살핀 것이다. 신앙은 불꽃처럼 시작할 수 있지만, 신앙이 오래 가려면 장작처럼 타야 한다. 불꽃은 강렬하지만 짧고, 장작은 조용하지만 길다. 해석가의 역할은 불꽃을 장작으로 옮겨 붙이는 일이다.
D6 신앙이 말하는 해석의 길: ‘들으라–질문하라–반응하라–기록하라’
D6 신앙의 언어로 말하면, 해석가의 길은 결국 네 걸음으로 정리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단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걸음을 함께 걸어주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들으라.말씀을 소리 내어 읽는 들음이 필요하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을 “눈으로”만 소비한다. 화면을 스치며 지나가는 문장들은 마음에 잘 남지 않는다. 하지만 소리로 읽은 문장은 마음의 방에 남는다.
질문하라.해석가는 질문을 닫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을 더 건강하게 만든다. 질문은 믿음이 약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믿음이 살아있어서 생긴다. 질문을 억누르는 공동체는, 결국 사람을 고립시킨다.
반응하라.경험이 진짜 은혜라면, 은혜는 반드시 삶의 작은 방향 전환을 낳는다. 갑자기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 한 가지가 달라진다. 말투 하나, 선택 하나, 용서 하나, 작은 순종 하나.여기서 교회는 늘 “주일의 감동”을 다시 “월요일의 순종”으로 연결해줘야 한다.
기록하라.사람은 잊는다. 그러나 기록은 방향을 기억하게 한다. 설명할 수 없는 은혜는 특히 더 쉽게 잊힌다. “그때 왜 울었지?” “그 평안은 착각이었나?” 그래서 기록은 신앙의 작은 울타리(관할권)가 되고, 동시에 다시 함께 서는 힘(통합권)이 된다. 기록은 그 복음이 168시간을 통과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그 복음이 939주를 통과하도록 돕는다. AI가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다음 회차에서는 삶의 ‘틈새’로 들어가려 한다. 가난과 생활고, 절망의 골짜기 같은 틈새에서, 왜 교회가 다시 ‘일상의 네 때’로 돌아가야 하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