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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하나님의 교육명령 포스트 트루스 시대, 진리를 향한 쉐마(경청)

제5회 | 포스트 트루스 시대, 진리를 향한 쉐마(경청)

정보는 많아졌는데, 이야기는 얕아졌다. 누군가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도 우리는 그 사람의 말에 흔들린다. 오늘 믿었던 것을 내일은 부정하고, 어제 분노했던 것에 오늘은 무감해진다. ‘무엇이 진리인가’보다 ‘무엇이 더 자극적인가’가 승리하는 시대, 사람들은 피곤해진다. 피곤함은 생각보다 조용하다. 소리 내어 울지 않고, 마음의 온도를 낮추며, “다 믿을 수 없어”라는 결론 쪽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풍경이 그렇다. 이어폰을 꽂은 채 화면을 내리던 손이 잠깐 멈춘다. 짧은 영상 하나가 사람의 표정을 바꾸고, 다음 영상 하나가 그 표정을 지워버린다. 누군가는 웃다가 곧바로 분노하고, 누군가는 분노하다가 곧바로 피로해진다. 우리는 감정의 빠른 이삿짐을 계속 옮긴다. 마음이 ‘여기’에 머물지 못하고 ‘다음’으로 떠밀린다. 그래서 이야기는 얕아지고, 사람은 얇아진다.

  그런데 그 피곤함 속에서 의외의 장면이 보인다. 어떤 지역에서는 성경이 다시 팔리고, 젊은 사람들이 ‘영적인 무엇’을 찾는다고 한다. 이것이 곧바로 모이는 교회의 성장으로 연결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사람들은 ‘진짜 이야기’를 갈망한다. 누가 조작해도 끝내 무너지지 않는 이야기, 내 기분이 흔들려도 나를 붙드는 이야기. 그 이야기의 오래된 형태가 다시 빛을 받는다.

  성경은 정보가 아니다. 성경은 살아 있는 이야기다. 이야기에는 문장이 있고, 문장에는 숨이 있다. 그래서 말씀은 눈으로만 읽을 때보다 귀로 들을 때 다른 결을 가진다. 소리 내어 읽는 순간, 문장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내 앞에 놓인 길’처럼 다가온다. D6 신앙이 말하는 ‘들으라’는 바로 소리 내어 읽는 경청, 마음의 방향을 바꾸는 경청, 그 자리에서 시작된다. 

포스트 트루스 시대의 위험

  위험은 거짓말이 많아진 것만이 아니다. 더 큰 위험은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는 냉소가 자라는 것이다. 냉소는 마음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마음을 텅 비게 한다. 그 빈자리에 들어오는 것은 대개 더 큰 불안이다. 믿지 않기로 결심한 마음은 안전해 보이지만, 결국 어디에도 기대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은 더 외롭고, 더 쉽게 조급해진다.

경청은 영성이다

  쉐마(경청)는 그 냉소를 이기는 방식이다. ‘나는 오늘도 들을 수 있다’는 믿음, ‘하나님이 여전히 말씀하신다’는 믿음, ‘가족이 서로의 말을 끝까지 들어줄 수 있다’는 믿음. 경청은 기술이 아니라 영성이다. 그리고 영성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시간을 들이지 않는 경청은 오래 가지 못하고, 시간을 들인 경청은 사람을 서서히 바꾼다. 속도가 느릴수록, 방향이 더 분명해지는 법이 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다’고 말할 때, 나는 그 동사를 조금 다르게 듣고 싶다. 읽는다는 것은 눈으로만 스치는 것이 아니라, 입술을 움직여 소리를 만들고, 귀로 다시 그 소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스크롤이 반사 신경을 만든다면, 낭독은 호흡을 만든다. 호흡이 돌아오면 마음이 돌아온다. 마음이 돌아오면 질문이 생긴다. 질문이 생기면 신앙은 다시 살아난다.

가정과 교회의 동역

  가정과 교회의 동역은 이 경청을 ‘일상화’하는 데서 빛난다. 교회는 주일에 본문을 펼쳐 주고, 가정은 그 본문을 주중에 되돌려 들려준다. 반복은 지루함이 아니라 심장의 박동이다. 박동이 멈추지 않도록, 우리는 작은 루틴을 세운다. 주일의 한 시간이 나머지 167시간을 비추도록, 말씀은 다시 ‘집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교회의 언어와 가정의 언어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종종 아이들에게 ‘성경을 읽어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명령보다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다. 부모가 성경을 숙제처럼 대하면 아이도 숙제로 받아들인다. 부모가 성경을 숨처럼 대하면 아이도 숨처럼 받아들인다. 그러니 먼저 어른들이 말씀 앞에서 숨을 고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교회 교육의 목표도 다시 조정되어야 한다. 지식을 더 많이 채우는 것이 아니라, 가정 대화를 한 번 더 생성하는 것. 아이가 집에서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살아난다.

  오늘의 시대는 말한다. ‘네가 믿는 것은 다 허상일지 모른다.’ 복음은 말한다. ‘그러나 너는 들을 수 있다. 너는 질문할 수 있다. 너는 반응할 수 있다. 너는 기록할 수 있다.’ 들으라–질문하라–반응하라–기록하라. 이 네 걸음은 포스트 트루스의 바다 위에서 우리를 흔들리지 않게 하는 작고 단단한 난간이 된다.

이번 주, 한 번만이라도 가족이 함께 소리 내어 말씀을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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