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아침에서 묻는 오래된 질문
종교개혁 500년, 끊어진 세대를 다시 잇는 교회
캐나다에 살다 보면 내가 소수자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언어가 다르다. 문화가 다르다. 한국에서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 이곳에서는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 우리 가족도 소수자이다. 그런데 이민자로 살아가는 것보다 더 낯선 순간이 있다. 오랫동안 믿어 왔던 신앙의 가르침이 사회적 논쟁의 대상이 되는 순간이다.
1960년대 이후 북미 사회는 시민권 운동과 여성운동, 성적 소수자의 권리운동을 거치며 크게 변화했다.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려는 노력과 전통적인 기독교 윤리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 함께 나타났다. 교회도 변했다. 캐나다 장로교회는 2021년 총회에서 전통적인 남녀 간 결혼과 두 성인 간 결혼을 병행하여 인정했다. 동시에 목회자의 양심에 따른 주례 선택권도 인정했다. 같은 교단 안에서 서로 다른 성경 해석이 공존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러한 변화를 바라보며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믿음을 남겨 주어야 하는가. 처음에는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더 오래 생각하니 또 다른 안타까움이 찾아왔다. 세상이 변하는 동안 교회는 다음 세대를 어떻게 준비시키고 있었는가.
종교개혁과 다음 세대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문을 열었다. 우리는 종교개혁을 생각하면 이신칭의와 성경의 권위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그 안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가정이다. 루터는 1529년 『소교리문답』을 만들었다. 부모가 자녀에게 십계명과 사도신경, 주기도문을 가르칠 수 있도록 했다. 말씀이 강단에서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도 들리기를 바랐다. 종교개혁은 가정의 신앙교육을 약화시키려던 운동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
시간의 역설
1780년 무렵 영국에서 시작된 로버트 레이크스의 주일학교 운동은 가난한 아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려는 사랑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이후 산업화와 도시화, 교회교육의 전문화가 진행되면서 신앙교육은 점차 연령별 프로그램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아이는 아이들끼리 배웠다. 청소년은 청소년끼리 모였다. 어른은 어른의 예배당으로 갔다. 교육은 세밀해졌다. 프로그램도 풍성해졌다. 그러나 세대가 함께 믿음을 살아가는 시간은 줄어들기도 했다. 우리는 세대를 나누어 가르치는 법은 배웠지만, 세대를 다시 잇는 일에는 충분히 힘쓰지 못했다.
한국교회에도 주일학교가 넘쳐나던 시절이 있었다. 주일 아침이면 골목마다 아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선생님은 출석부를 들고 이름을 불렀다. 찬송이 들렸고, 성경을 외웠다. 그 아이들이 자랐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주일학교를 다니던 아이들이 이제는 부모 세대가 되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이 교회와 멀어졌다. 그들의 자녀도 교회에 오지 않는 경우가 있다. 왜 그럴까. 사회적 변화와 교회에 대한 상처, 개인의 신앙적 고민 등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를 더 물어야 한다. 아이들은 성경 이야기를 배웠는데, 그 이야기가 가정의 이야기가 되었을까. 기도하는 법을 배웠는데, 기도하는 부모를 보며 자랐을까. 교회에서 배운 말씀이 월요일의 삶으로 이어졌을까. 신앙을 가르치는 것과 신앙을 물려주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가르침에는 교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전수에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필요하다.
길가의 풀꽃, 그리고 할머니와 손자의 맞잡은 손
이제 AI 시대이다. 아이가 질문하면 AI는 대답한다. 성경의 배경도 설명하고, 서로 다른 신학적 견해도 비교해 준다. 그러나 AI가 성경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성경을 읽어 주는 부모가 필요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AI는 기도문을 작성할 수 있다. 그러나 자녀의 손을 잡고 함께 기도하는 부모의 삶을 대신할 수는 없다. AI는 용서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잘못한 자녀에게 먼저 용서를 구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대신할 수는 없다. AI는 신앙의 역사를 알려 줄 수 있다. 그러나 할머니가 평생 붙들었던 말씀을 삶으로 고백하는 순간을 대신할 수는 없다. 아이는 설명만 듣고 자라지 않는다. 사람을 보고 자란다. 말투를 배우고, 표정을 기억하고, 행동을 닮아 간다. 그렇게 한 사람의 삶이 형성된다. AI 시대에 교회가 더욱 중요해지는 이유는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믿음을 살아 내는 사람이 더욱 필요하기 때문이다.
캐나다의 작은 이민교회에서 한국교회를 바라본다. 때로는 걱정스럽다. 교회는 줄어들고, 세대는 멀어지고, 가정은 여러 어려움 앞에 서 있다. 그러나 작은 풀꽃이 있다. 사람들은 잘 보지 않는다. 키가 작기 때문이다. 길가에 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보면 다르다. 작은 꽃잎이 있고, 여린 줄기가 있고, 땅속으로 내려간 뿌리가 있다. 꽃은 작지만 생명은 작지 않다. 교회도 그렇다. 작은 이민교회라고 해서 믿음까지 작은 것은 아니다. 아이가 몇 명 없다고 해서 다음 세대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할머니 한 사람이 드리는 기도가 작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늘 한 사람이 심은 믿음의 씨앗이 내일 한 아이의 삶에서 피어날 것이다. 그 아이가 다시 씨앗을 심을 것이다. 그렇게 꽃은 이어지고 믿음은 이어지고 교회는 이어진다. 오늘의 교회를 넘어, 세대를 잇는 교회로. D6 교회는 세대를 잇는 교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