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죽음에 이르는 죄 (5)
고대 그리스의 현인 (賢人)들은 분노를 찬양했습니다. 부당한 폭력을 바로 잡아 정의로운 사회를 세우기 위해 분노는 사람이 갖춰야하는 미덕으로 이해되었습니다. 플라톤은 가증하고 사악한 모든 죄를 향한 분노는 신성한 것이며, 화낼 능력이 없으면 도덕적 불감증에 빠진다고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집을 지키는 개가 도둑이 오면 바로 짓는 것처럼, 모욕적이고 경멸을 선동하는 원수에 대항하여 화를 발하는 행동은 칭찬 받을 일이며, 죄에 대하여 굴복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로 여겼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사람은 열매 나무처럼 가지치기와 경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와 욕망을 키우는 본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영혼 속에 뿌리 내리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과실 나무의 성장과 개선에 부드러운 관심을 가지고 친절하고 세심하게 보살피는 하나님처럼, 인간은 그 속에 있는 썪거나 거칠은 가지를 잘라내어 다른 가지들을 보호하고 아름답게 옷을 입혀 섬기고 열매 맺도록 만들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분노의 긍정성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따라서 적합한 분노는 용기와 불굴의 정신을 일으키는 데 훌륭한 도구가 된다. 정신적 결함이 있는 사람에 대한 증오와 혐오감은 정의의 집행을 촉진한다. 자기 삶의 필요 이상으로 번영하는 사람들에 대한 정당한 분노는 좋은 것이며 심지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자만심과 무례함으로 그들의 마음이 너무 부풀어 오르고 우쭐해져서 결국에는 고통 가운데 쓰러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분노는 애정의 한 표현으로 성경은 그것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 진노하는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하여 모세는 진노합니다. 느헤미아는 빈궁에 처한 자기 형제들을 대상으로 고리대업하는 악덕 귀족들을 향하여 크게 분노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선하심과 마찬가지로 죄를 범하고 거스리는 자들에게 진노하시는 분이심을 일관성 있게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욕망에 이끌려 진리의 길을 벗어난 그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시는 애정의 한 방법입니다. 고대 히랍인들은 이러한 진노를 “파로르기스모스”라 했습니다. 이 낱말을 “의분 a righteous anger”으로 번역한 히랍어 학자 트렌취는 인간 속의 불순물이 빠져나가 의로움이 채우기 위해 의분의 불가피성을 강조합니다.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여 경건에 이르게 하는 수단인 의분과는 다른 측면의 분노가 있습니다. 고대 히랍인들은 이 분노를 “파로르기스모스”와 구별된 낱말을 사용했습니다. “뚜모스”와 “오르게”입니다. 서로 대용할 수 있는 이 단어는 본래 공기나 물, 그리고 동물과 사람의 격렬한 움직임을 함축했습니다. 점차 이 단어들은 인간의 욕망, 충동적 성향, 격한 감정, 그리고 분노와 같은 용도로 사용됩니다. 고대 히랍 문학에서 쉽게 발견되는 이 낱말들은 인간과 짐승의 “원기나 정력이 지나치게 치밀어 오르는 상태” 혹은 “충동적인 본성에서 솟구치고 밀쳐 오르는 상태”를 설명할 때 사용됩니다. 충동적 성향의 분노가 개인의 성품이나 기질과 관계될 때는 언제나 비극적 상태를 초래합니다. 분노는 사람에게 잘못된 판단을 일으켜 거짓된 해석을 하게 하여 치명적인 행동을 유발시킵니다. 에바그리우스는 분노를 인간의 영혼을 어둡게 만드는 가장 극력한 감정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분노는 사탄이 기도를 방해 하기 위해 촉발하는 악한 감정으로 신자들의 강력한 적이다고 설명했습니다. 고대 그리스 시인 소포클레스는 분노를 인간의 본성에 숨어 있는 악마가 폭악한 힘으로 치명적인 고통과 아픔을 일으키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분노의 결국은 살인으로 이어집니다.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던 여호와께서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자, 가인은분하여 안색이 변합니다. 그리고 동생을 쳐 죽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여동생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가 심히 진노합니다. 그들은 3일 후에 세겜의 동네를 기습하여 그곳 남자들을 모두 죽여 보복합니다. 바빌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신상에 절하라는 자신의 명령을 거절한 다니엘의 세 친구를 향해 분이 가득 찼습니다. 그는 이 세사람을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 던지라고 명령합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말씀을 들은 자들이 크게 화가나서 일어나 예수님을 동네 밖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서 죽이려고 시도했습니다. 불행히도 분노는 거의 항상 모든 사람에게 최고의 절망과 고통을 가져 옵니다. 고대로부터 교회는 분노를 죽음에 이르는 죄로 분류합니다.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판을 받게됩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됩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가난한 마음과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통해 분노를 다스릴 수 있다고 알려 줍니다.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추구하면, 곧 양심의 가책을 받아 부담을 느낍니다. 그것은 평안을 추구하는 데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 욕망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진정한 평화는 욕망에 굴복함으로써가 아니고, 욕망에 저항함으로써 찾아야합니다. 마음의 평화는 육적인 사람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주변 일에 헌신적인 사람에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영적인 일에 열성적인 사람에게만 있습니다.
이남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