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칼럼박태겸 목사의 말씀과 자연 묵상 사랑의 모양을 가진 배반 (눅22:47-48)_박태겸목사(무스코카 로뎀하우스 원장)

[칼럼: 말씀과 자연묵상] 사랑의 모양을 가진 배반 (눅22:47-48)_박태겸목사(무스코카 로뎀하우스 원장)

사랑의 모양을 가진 배반 (눅22:47-48)                  박태겸목사(무스코카 로뎀하우스 원장)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할 때 가까이 다가와 사랑의 입맞춤을 하였습니다. 보통 사람이면 배반할 때에는 그를 가까이 만나거나 눈을 맞출 수 없습니다. 두렵기도 하고 최소한의 양심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배반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의 모습을 유지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입을 맞추려고 의도적으로 가까이 갔던 것입니다. 당시 상황은 밤이었고 겟세마네 동산은 어두운 숲이었습니다. 원수들이 횃불을 들고 나타났지만 정확하게 누군지 식별할 수 없었고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유다의 키스는 ‘식별 신호’였습니다. 단순히 손가락을 가리키거나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악수나 포옹이 아닌 ‘입맞춤’으로 확실한 신호를 짲던 것입니다 . 유다는 무리를 끌고 앞장서서 다가와 예수님께 입을 맞추었습니다. 당시 입맞춤은 사랑과 존경의 표시였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원수의 저주를 통해 배신당한 것이 아니라 제자인 유다의 친밀한 관계를 증명하는 입맞춤을 통해 배신을 당했습니다. 그는 “랍비여!” 라고 부르며 주님께 다가갔습니다(마26:49). 이로인해 예수님에게는 입맞춤에 대한 두려운 트라우마가 생겼을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도 믿지 못하는 깊은 불신의 감정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를 특별한 배신의 사건으로 받지 않았습니다. 충격적인 배신 앞에서도 그를 향한 사랑의 감정이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마26:50)” 라고 답했습니다. 배신당하는 순간에도 예수님은 감정이 폭발하거나 대항해서 싸우지 않았습니다. 상처와 슬픔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흘러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계시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지혜로운 대응입니다. 여기에 ‘친구여’는 헬라어 ‘헤타이레’로 친밀하고 깊은 사랑의 관계를 뜻하는 호칭입니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친밀한 친구이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괜찮아!”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내가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을 때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가장 큰 상처와 트라우마를 특별계시로 받기보다 예수님처럼 양심을 조명하는 자연계시로 넘길 수 있는지요? 게다가 유다는 예수님을 사람에게 넘겼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아버지 손에 맡겼습니다. 여기서 치유가 일어납니다. 치유란 배반의 사건으로 생긴 트라우마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더 이상 나의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손에 다시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배반의 최종적인 해석권을 유다에게 넘겨주지 않으심으로 이겼습니다. 이것은 자연의 섭리를 통해 배운 신앙의 원리와 기초에서 나왔습니다. 유다의 배반이 예수님의 사랑의 속성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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