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우리도 한 번, 예수 따라 가세!”
본문: 요6:14,15
임재택 목사(토론토 중앙 교회)
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지난 주, 바이든이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연세가 42년생으로서 78세라고 합니다. 전 대통령 트럼프는 46년생으로서 74이라고 합니다. 70이 넘어서도 여전히 대통령이 되고 싶어 하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은 그 짱짱한 욕망의 30대에도 임금됨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평소에 자신이 가르친데로 사셨습니다. 대통령 또는 임금이 되면 모두 누릴 수 있는 5복이 아니라 거룩하게 되는 8복을 가르치시면서 그렇게 사셨습니다.
여러분,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아십니까?
그것 몰라도 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이 임금됨을 거절하고 혼자 산으로 가신 까닭 정도는 알고 살아야되지 않겠습니까?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장정 5,000명 이상이 먹고 남았을 때 군중들을 포만감에 젖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표적을 행하셨는데 군중들은 여전히 포만감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자신의 포만감을 위해서 신앙해 오는 분들이 있어서 안타까습니다. 2,0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시는 정도의 기도를 하고 그 정도의 이유로 예수님을 만나 붙잡기를 원하는 분들이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벳세다 들녘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바래던것과 같이 배고픈 때는 대한민국은 지났고 캐나다도 진작에 지났습니다만 아직도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고 신앙하는 것이 안타깝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내 배 부르고, 내 자식 잘 되고, 내 미래의 노후가 안락하기만을 기도하며 살 것이냐는 말입니다.
한국에서는 70년대 한 창 어려울 때 이 노래를 부르며 “새마을 운동”을 하였습니다.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세… 잘 살아보세…”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과연 주님의 뜻이었을까? 아니면 배부른 군중들과 같은 우리의 뜻이었을까요? 군중들이 환호하고 열광하는 그 인기에 힘입어 임금이 되었다면 잘 먹고 잘 사는 최고의 조건을 갖추는 것이었겠지만 예수님은 임금되기를 거절하시고 산으로 가셨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하는 모습과 많이 다른 모습을 보이신 것입니다.
맨날 예수님을 닮기 원한다고 하고 예수님을 따라 간다고 말만 하면서 우리는 지금도 군중들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예수님의 마음은 먼저,
- 인기(人氣) 보다 신기(神氣)
를 중요하게 생각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4절.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자신들을 배부르게 한 젊은 청년 예수를 바라보는 군중들의 시선은 한결 같았습니다. “바로 이거지, 우리가 기다렸던 선지자, 메시야, 임금님은 바로 이런 사람이지…우리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고 … 능력이 있어서… 다른 더 큰 능력도 베풀어 줄 것도 같은 사람…”그리고 예수님을 붙잡아서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런 욕망의 눈빛을 바라보고 또 그런 욕망으로 요동치는 군중들의 마음을 바라보는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그럼… 그럼… 드디어 나를 알아 보는구먼, 드디어 … 세례 요한의 시대는 가고… 내 시대가 왔구나” 하고 흐뭇해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을 떠나가셨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인기가 있어서 높은 자리에 오르고 권력의 자리에 앉게 되면 인생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인기”가 뭡니까? 사람으로부터 관심받고 인정받고 칭찬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인기에 관심이 없으셨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는 “신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통하실 수 있는 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는데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관심을 받고 칭찬받기를 원하셨다면 출생부터 달랐을 것입니다.
아예 그랬다면 처음부터 말구유에 오시지 않았고 40일 금식하신 후에 사탄에게 시험받으실 때에도 달랐을 것입니다. 그 때 이미 돌을 떡으로 만드는 기적을 베풀었거나 높은 성전위에서 뛰어 내려도 다치지 않는 모습을 보이시면서 인기몰이를 하셨겠지만 그런 인기에는 별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신적도 있으십니다. 인간으로부터 영광을 취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요5:41 [개역개정]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NIV] “I do not accept praise from men,
그런데… 우리는, 임금되기를 원할까요?
그런데 우리는 왜 오늘도 예수님을 따라 산으로 가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보다 세상으로 나가서 인기 몰이를 해서 임금이 되기를 원하는 것일까요? 우리의 자질을 봐서 안되겠다 싶으니까 우리의 자녀들이라도 그렇게 만들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일까요?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이 주님의 뜻대로, 주님 따라 신앙하지 않고 우리의 욕망대로 신앙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대해도 내 욕망 성취의 에이전트 정도로 취급하고 몸된 교회를 그 에이전시 정도로 생각하고 신앙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의 욕망에 불타오르는 군중들을 떠나셨습니다. 성경속에는 그런 예가 많이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이스라엘 초대왕이었던 사울왕의 경우에 그랬습니다. 한 때 사울왕은 성령에 충만하여서 예언한 적이 있었고 겸손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서 임금 삼으셨습니다. 하지만 왕이라는 자리에 연연하며 욕망하기 시작할 때부터 성령이 떠나가셨습니다.
신약에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가 그랬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성령께서 감동을 주셨을 때는 헌신하기로 작정했다가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혀서 아깝게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거짓의 영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인기보다 신기에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나는 오늘 어떤 태도로 예수님을 붙잡고 신앙하고 있는지 돌아보시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예수님의 마음은
- 기도보다 순도에 관심이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15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혼자/ 산으로” 가셨다는 것은 스스로 “고립”을 선택하신 것이었습니다. “산으로” 가셨다는 것은 공간적 고립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저물매”(16절에)는 시간적, 시각적 고립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혼자” 가셨다는 것은 관계적 고립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한국 신앙인들의 묵상을 방해하는 최대의 적이 “카톡”아닐까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고 소통이 원할하지 않으면 욕을 먹다 보니까 최대한 빠를 시간내에 답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면서 알림이 오면 묵상하다가도 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묵상을 위해서는 “묵음”을 해 놓거나 셀폰을 꺼 놓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저는 적용한지 약 200일 정도가 되는데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가셔서 기도만 했을까요? 기도하기 전에 또 기도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구했을 거라고 믿습니다. 기도하기 전에 점검해야 할 것이 있다고 야고보서를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약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그렇기에 예수님은 끊임없이 점검 하였을 것입니다. 기도하기 전에 먼저 순도를 높였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다녀 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오늘 사역한 것은 목적에 합한 일이었는지, 내일 간교하게 질문하고 시험 해 올 이들에 대해서는 큰 구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참아야 하며 또 어떻게 은밀하게 행하실지… 먼저 그 순수한 마음을 점검해 보셨으리라 믿어 지는 것입니다.
약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한 마디로 말하면 기도하기 전에 순도를 높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 말씀이 올 해의 표어를 잘 말해 줍니다. 이 참에 표어 한 번 외치고 넘어가십시다.
“행복을 넘어 거룩으로 도약하는 한 해”
놀라운 사실은 기도 응답 받아서 임금되고 내가 행복하는 것보다 산으로 가서 묵상하여 “순도”를 높이면 내가 하나님의 응답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할렐루야! 우와, 이거 진짜 중요한 말입니다. “내가 거룩해 질 때, 내가 하나님의 응답이 됩니다.” 세 번 반복해서 외칩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매일 순도를 높여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셨고 하나님의 응답이 되셨습니다.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 번째로 알아 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 워라벨과 워메벨. 다시 읽어 보십시다.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워라벨”이라는 신조어가 있습니다.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워크 라이프 밸런스(Work-Life Balance)’는 1970년대 영국 워킹맘협회에서 개인의 업무와 사생활 간의 균형을 묘사하는 단어로 처음 등장했습니다. 벌써 50년이 된 용어이지만 최근에 삶이 녹록치 않은 한국에서 회자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공부 전쟁에 시달리는 한국의 자녀들에게도 적용해서 ‘공부와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스라밸(Study-Life Balance)’ 이라는 표현도 쓰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저녁에 산으로 혼자 가셔서 뭐 하셨을까? 생각할 때 우리는 짐작합니다. 성경에서는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다” 라고 나오니까 알 수 있습니다. 말씀 묵상도 하셨겠지요. 요즈음 우리의 일반적이 표현으로 하면 “큐티(Quiet Time)” 라고 할 수 있겠고 전통적인 표현이라면 “메디테이션(Meditation)”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추구하셨던 것은 “워-메, 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낮에 가르치시고 시험을 이기시고 사람을 살리시는 그 모든 힘과 지혜는 저녁에 가진 그 시간을 통해서 충전하셨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워라밸”보다 “워메밸”을 가지는 삶이 마땅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워메밸”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는지를 잠깐 살펴 보십시다.
기회비용(機會費用), 오포튜니티 코스트(opportunity cost 또는 alternative cost) 는 단어는 우리는 배웠습니다. 어떤 한 가지를 선택했을 때 그것의 가치는 그 선택으로 인해 포기한 것들 중 가장 큰 것의 가치를 말한다구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워메밸”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셨는지를 알려면 산으로 가시면서 뭘 포기하셨는가를 짚어 보면 알 수 있을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떠나 가셨다”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기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들을 살리기 위해 다가 가셨고 찾아 가셨습니다. 베데스다 행각에 있던 38년 된 병자에게 다가 가셔서 고치셨던 주님, 사마리아 수가성에 외로운 여인에게도 다가 가셔서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셨던 주님, 거라사 무덤가의 광인에게도 찾아 가셔서 자유케 하셨던 주님께서 그런 분들을 떠나가셨다는 사실은 저녁의 묵상 시간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셨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또한 열 두 제자들을 부르셨고, 따라 오라고 하신 주님께서헤어진 후에 배를 타고 갈릴리에서 풍랑을 만나는 위험속에 처할 제자들을 그냥 보내셨다는 것을 보면서도 묵상 시간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셨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합니다.
주님께서는 사역하는 것 보다 제자들을 보호하는 것 보다 하나님 아버지를 가까이 하고 순도를 높이는 시간을 우선 순위에 두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한 놀라운 사실은, 한 번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혼자, 산으로 가셨다… 는 것은 반복을 의미합니다. Again and again… 매일! 지난 주에 갔으니까 이 번 주에 안가는 것이 아니라 또 갔다는 말입니다. 어제 저녁에 갔으니까 오늘 늘 저녁에 안 간 것이 아니라 또 갔다는 말입니다. 매일 저녁 그 시간을 가지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분별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제 점심 반찬을 기억하시나요? 어제 먹은 반찬도 기억 못하는 우리인데 어떻게 10년, 20년, 30년 전에 죄인임을 깨닫고 구원 받은 그 감격을 간직해서 오늘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 감격을 매일 새롭게 하고자 매일 산으로 가신 예수님을 따라 산으로 가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군중 깊숙히 머물면서 그들을 따라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서둘러 따라가야 산으로 가신 예수님 조금이라도 따라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자신에게 적용하는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적용질문: 나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인기를 얻어 임금되기를 원하였던 적은 언제였던가?
최근에 한 친구 목사님과 통화 하는데 그 분이 “싱 어게인”에 한 번 나가 보라고 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당신처럼, 때가 된 사람이나 주님이 들어 쓰시는 거지…’했습니다. 말씀 묵상하기 전에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임금되기를 욕망했던 때가 생각이 났습니다. 유명해 지고 싶은 때가 있었습니다. 대학가요제에 나가고 싶었습니다.
“밀려 오는 그 파도 소리에…, 나 어떡해”, 대구 보건 전문대 출신으로 동상을 받은 최미양의 “하나가 된 철새” 등을 테이프가 늘어 나도록 들었고, 틀어 놓고 그것 들으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정작 대학에 갔을 때는 신앙이 조금 들어서 그냥 세상의 가요제 보다는 복음성가 경연대회에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고 CCC주최 제1회 전국 대학생 복음 성가 경연 대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동상을 수상하게 된 저는 그 아쉬움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선교에 관한 마음이 조금 더해 지니까 북한 선교를 위한답시고 빚을 내어서 “탈북 고아들의 노래” 라는 음반도 내었습니다. 그 때 음반을 내면서 생각했던 것이 “한국 천만 기독교와 통일 한국의 대부가 되리라” 는 것이었습니다. 요즈음 말씀 묵상을 하면서 생각해 보면 참 어이도 없고 말도 안돼는 일을 욕망하며 살았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나의 욕망을 섞어서 살아 보려고 했던 그 모든 시간을 회개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제 우리도 사람들 따라 세상으로 가서 임금되려 하지 말고 또 그것 위해 기도하지 말고 예수님 따라 산으로 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올 해는, “행복을 넘어 거룩으로 도약하는 한 해”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는 바꾸어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잘 살아 보세~ ” 가 아니고 “예수 따라 가세~ 예수 따라 가세~ 우리도 한 번 예수 따라 가세~ 예수 따라 가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