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te icon The ChristianTimes

[설교단상]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요한복음 14:6)_나나이모은혜장로교회 조용완 목사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14:6                                     

나나이모은혜장로교회 조용완 목사

예수님이 꿈꾸셨던 교회, 하나님이 마음에 두셨던 그 교회는 지금까지 지구상에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기에, 우린 현실의 교회를 보면서 실망할 필요는 없지만,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건강한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건물을 짓거나 조직을 강화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변하고 성숙하는 가운데 우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주장대로라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길입니다. 

교회는 우리를 품어 주시는 하나님의 품입니다.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 주며 사랑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늘 분주하고 염려 많고 때로 욕심으로 자신을 몰아가게 하는 세상 가운데 살아가지만 주님의 품 안에서,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아름답고 의미 있는 삶을 사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그가 무엇을 하셨는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나는 예수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앙의 방향과 색깔이 달라집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우리의 삶의 주인이십니다. 여러분들은 삶의 주인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일반적으로 세 가지 대답이 나옵니다. 내 인생은 내꺼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내 인생은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자기의 인생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누구의 것이냐는 대답이 자신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이 내 것이라고 하는 사람은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삶일 것입니다. 또한 인생은 가족이 전부라고 하는 사람은 가족이 시키는 일이나 원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삶일 것입니다. 하지만 내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3:1에는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지명하여 불렀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내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이사야 43:2에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라는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홍수가 나는 그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요. 인생의 홍수가 무엇이겠습니까? 상상치 못하는, 예기치 못하는 그런 일들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우리로 하여금 혼란에 빠지게 하고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그런 인생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건져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불같은 시련이 우리에게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아니하고, 그 불같은 시련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주님 만난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겠습니까? 난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에게만 열려지는 인생의 축복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본문은 왜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신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올 자가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길이라는 것은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인생의 방향, 삶의 좌표, 인생의 길이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길”이란 단에 앞에 영어 성경에는 정관사 “The”가 붙어있습니다. 이는 유일한 길, 하나밖에 없는 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밖에 없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종교는 사람들이 신을 만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만나기를 원하시는 것 아십니까? 성경에서는 수도 없이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초청하실 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입니다. 

요한복음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말씀’으로 번역된 단어의 원어는 ‘로고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예수께서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 ‘함께’가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혼자서 자족하는 분이 아니라 늘 함께 있기를 좋아하는 분, 그래서 함께 계신 분입니다. 그리스도의 별명이 말씀이라는 것부터 그분의 강한 관계 지향성을 보여줍니다. 어떤 대상을 향해 말을 건넨다는 것은 단순히 소통을 넘어 관계를 맺고 싶은 의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길이 됩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길이 되십니다. 여러분 혹 용서하고 싶지 않은 사람 있으신지요, 나 저 사람 도저히 용서하고 싶지 않아 라는 사람 없으세요? 있을 수 있죠. 죄는 관계의 총제적 파괴입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기 때문에 시기하고 질투하며 싸우는 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 용서하고 싶지 않은 사람 어떻게 용서하게 됩니까?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 안에 미움이 사라지고 우리 안에 끓어오르는 증오심과 악한 생각이 사라지고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사이를 연결해주는 길이 되십니다.

그분은 또한 진리라고 말씀합니다. 진리가 무엇이겠습니까? 진리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변하지 않는 구원자라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 본문이 말하는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모든 사람의 관심은 생명에 있습니다. 누가 생명을 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생명 자체이십니다.  

[예화] 김성화라는 분이 계십니다. 경북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수학선생님을 하던 이 분이 어느날 인생이 너무 허무하게 느껴졌습니다. 갑자기 마음속에 인생이 허무하게 생각이 들면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중이 되어 남은 생은 도를 닦으면서 진리 가운데서 살다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절을 찾았습니다. 도를 닦다 보니 불교계가 너무 썩었다고 느껴져서 개혁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며 불교대학을 세우려는 과정에서 불교 단체들의 내분에 휘말리면서 억울하게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는 교도소 안에서 불경을 읽으며 진리를 탐구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책을 빌려다 주는 교도관이 신청한 불경을 가져오지 않고 신약성경을 가져왔답니다. 그래서 나는 중이니까 이런거 필요없고 신청한 불경을 가져다 달라 하니까, 불경은 다 대출되고 없어서 대신 가져왔으니 한번 읽어보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읽던 중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7:11-17절을 읽는데, ‘나인’이라는 성에 한 과부가 나옵니다. 그 과부에게 아들이 하나있는데,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어 상여를 따라 가고 있는 과부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상여를 따라가던 중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상여를 멈추게하고 죽은 청년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이 명령을 받자 생명이 없는 죽은 청년이 벌떡 일어나 그 어머니에게 갔습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내용이 불경에도 나옵답니다. 옛날 인도의 구시라성의 한 숲길을 석가모니가 제자들과 함께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과부가 와서 울며 이야기합니다. 부처님 내 외아들을 살려주십시오. 그랬더니 석가모니가 처방을 일러주었답니다. “마을에 가서 한 분도 삶이 죽은 일이 없는 집의 쌀을 얻어다가 죽을 끓여 먹이면 너의 아들이 살아날 것이다.” 여인이 너무 기뻐 온 마을을 찾아 헤맸지만 결국 얻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부처님 하루 종일 다녀도 사람이 죽은 일이 없는 집이 없습니다. 그러자 석가모니가 말합니다. “인생은 생자필명이라, 사람이 나면 반드시 죽는 법, 인연따라 일어나서 인연따라 없어지는 것, 너무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

여기서 그는 불교와 기독교의 생사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를 발견했습니다. 인생의 근본적인 생사문제를 제기했을 때 해답을 주시는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다. 그후 출감하여 이제는 목사가 되어 불교신자들을 위해 전도하는 사역을 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예수님 없는 우리의 삶은 죽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도 재미가 없고 권태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삶 속에 진정한 생명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족함도 없고 불안해하며 살아갑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4:12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하늘 위에나 땅에서나 아무도 우리의 구원자로 주신 일이 없음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필요합니까? 내 능력으로는 안됩니까?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무엇일까요? 구원은 관계의 회복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관계가 깨어졌는데, 그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로마서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고 할 만큼 하나님과의 관계가 심각하게 깨어졌는데, 그 관계가 화목하게 되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화해의 방법은 누가 정합니까?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피해를 본 분이고 관계가 깨어지는 아픔을 당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화해의 방법은 하나님이 제시하셔야 마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화해의 방법으로 정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실 길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죄 없으시나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지만 3일 만에 부활하시사, 40일 뒤에 승천하셔서 오늘도 여러분을 위해 성령을 보내 주시고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시고 여러분을 위해 다시 오실 것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내가 화해의 방법을 정하는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이 제시해 주신 화해의 방법을 받아들일 것인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화해의 방법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구원의 길입니다. 

그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모시기만 하면 하나님 나라의 비자를 받을 뿐만 아니라, 이 땅 위에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서 영원히 살 특권과 영광을 누리는 사람이 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가?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후회함 없는 행복하고 멋진 삶을 살아왔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돌이켜 보십시오. 나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좌절과 절망의 늪에서 가슴을 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영혼의 안식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며 쾌락과 물질과 명예를 얻으려고 하지만, 고통뿐인 삶을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누군가에게 소리치고 싶은데 소리조차 칠 수 없는 답답한 심정으로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밀려드는 외로움과 고독함이 여러분의 목을 누르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지금까지 교회에 다니면서도 기쁨과 감격은 커녕 주일이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성경을 들고 나와 앉아 있지는 않았습니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은 오늘 이시간까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여러분을 기다려 오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께서는 마음의 문을 열도록 여러분을 초대하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여기서 말하는 ‘문’은 바로 ‘나’라는 존재 속으로 들어오는 문입니다. 두드린다는 말은 열어 달라고 간청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라는데, 그냥 손잡이를 돌려서 우리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오시면 되지 않을까? 질문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럴 만한 능력이 없으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는 행위에는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관계의 시작을 상대방의 결정에 맡기겠다는 겸손함이 묻어나는 그림입니다. 

혹시 한참을 두드려도 열어 주지 않는 문 앞에 서서 기다려 본 적이 있으십니까? 어찌 보면 참으로 비참한 경험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 나를 위해 자신을 낮추신 모습입니다. 

안에서 문을 열어서 예수님이 들어가시면 그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것은 곧 식구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딸과 아들로서 삶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함께하는 사귐이 시간 내 마음의 주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길 원하십니까?

지금까지 교회를 다니면서도 기쁨 없는 신앙생활을 해왔는데 이제는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 나를 받아 주십시오.”라고 고백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it mobile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