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이 돌보신다_에스라 5:1-5
밴프한인교회 박석민 목사
1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2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있어 그들을 돕더니 3 그 때에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다 나아와 그들에게 이르되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하기로 4 우리가 이 건축하는 자의 이름을 아뢰었으나 5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아뢰고 그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더라
들어가기: 돌봄
여러분들은 삶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경험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물론 ‘지금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돌보심이고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아주 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돌보신다고 하는데, 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정말 그 말씀대로 경험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정말 그의 백성들을 돌보시는구나!’라고 깨닫고,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돌봄이 무엇입니까? 돌봄은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먼저 경험해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정에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돌봄은 시작됩니다. 돌보지 않으면 이 아이는 건강하게 자랄 수 없습니다. 한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우리는 누군가의 돌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돌본다는 말은 부모가 자녀를 돌보듯이 보호하고, 보살핀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냥 눈으로 보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돌봄 가운데 사랑과 책임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모로서 언제나 완벽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돌봄은 가끔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실수투성이 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
그러나 하나님의 돌보심은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도 그의 백성들을, 그의 자녀들을 돌보시는데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신실하고, 완벽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신실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나요? 우리 개인의 인생, 삶만 돌아봐도 그런 것 같지 않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신실하고 완벽하게 돌보셨다면, 내가 이런 모습은 아니었을 텐데!’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무언가 잘 되었을 때 하나님의 돌보심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좀 살아봐서 알지만, 인생을 살다 보면 잘 될 때보다 잘 되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면 그때는 하나님이 돌보지 않으셨던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실수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연약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돌보십니다. 작게는 지금 에스라서의 유다 백성들을 돌보시고, 크게는 이 작은 돌보심을 위해서 이미 준비하시고, 계획하시고, 이루시고, 또 앞으로 미래에도 이루어 가십니다. 지금만 돌보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언제나 돌보셨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깨닫지 못했던 그들이, 그리고 우리들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 하나님의 신실한 돌보심을 확인하고, 우리의 삶 속에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전 답게
유다의 백성들이 포로에서 돌아왔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서 무너진 성전을 다시 지어야 했습니다. 누가 성전을 지어야 했을까요? 성전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보통 레위인들이었습니다.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이 무너지고 다시 지어야 할 때 레위인들만 성전 건축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습니다. 석수나 목수 같은 성전을 건축하는데 필요한 기술자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성전 건축에 참여합니다. 심지어 자신이 소유한 것들을 아까워하지 않고 성전 건축을 위해 내어놓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도 성전 건축에 참여하고자 했습니다. 성전을 건축한다는 것에는 많은 돈과 자원이 들어갔습니다. 만일 한 명이라도 더 많았다면 좋은 일 아닌가요? 그러나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이 성전 건축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성전을 건축하는데 돈이나 자원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이 볼 때 건물을 건축하는데 그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돈이 중요해!’ 사실 지금도 여전히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이전의 성전, 솔로몬 성전은 어마어마한 황금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화려한 성전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성전 답게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잘못된 제사를 드렸습니다.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성전은 화려했지만, 그들의 믿음은 화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70년 전 하나님의 심판으로 화려한 성전이 무너지고, 포로가 되는 사건들을 통해서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달았고, 돌아보았고, 회개하였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구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그냥 성전을 지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전에 대한 사람의 방법과 생각을 거부하였습니다. 사람의 생각대로 또는 말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대로 성전을 짓고자 합니다. 그리고 무너진 성전뿐만 아니라, 무너졌던 그들의 믿음을 바로잡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들만 성전 건축에 참여하게 합니다. 성전을 성전 답게 하는 첫걸음이었습니다.
문제
성전을 성전 답게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도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의 돌보심 만을 구하면서 믿음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만 성전 건축에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대단한 의지이고, 믿음이었겠습니까! 그렇게 야심 차게 성전 건축을 준비하며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전을 건축하는 과정을 보면 항상 좋은 일만 있지 않았습니다. 잘만 되지 않았습니다. 방해꾼들이 나타났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성전 건축 참여를 반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쁜 마음이 생겼습니다. 성전 건축을 방해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 방해에 네 명의 바사 왕이 언급됩니다. 고레스, 다리오, 아하수에로, 아닥사스다입니다. 고레스 왕이 BC 539년부터 통치를 했고, 아닥사스다는 BC 465년부터 통치를 했으니 방해한 연수를 계산해 보면 최소한 74년입니다. 남유다 포로기간이 70년이었는데, 그보다 더 많은 기간 동안 성전을 건축하고, 유다를 재건하는데 방해의 연속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지금 가장 큰 문제를 만났습니다. 실제로 성전을 건축하는데 바사 왕의 명령에 의해서 중단됩니다. 그 기간을 15에서 16년 정도로 봅니다. 어렵게 시작한 공사였는데,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하나님의 돌보심을 찾을 수 있나요? 여기까지만 보면 하나님이 바사 왕보다 약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것보다 멀리서 그저 지켜만 보시는 것 같습니다. 마치 이런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삶의 문제를 만날 때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으로 그의 백성들을 돌보십니다.
말씀
오늘 본문에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스 5:1).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성전 건축 중단 이야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과 함께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일어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중단된 성전 건축이 어떻게 다시 시작할 수 있었나요? 바사 왕이 다시 조서를 내려야만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조서 없이, 왕의 명령을 거스르고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덕분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그들에게는 위로이고, 힘이고, 소망이고, 용기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돌보심을 확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고, 말씀이 마음에 울릴 때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되고, 의지하게 되고,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되고, 그 어떤 방해도 큰 위기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그들에게는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위로와 힘이 되었던 적 있으신가요? 언제 이 ‘하나님의 말씀이 진짜구나!’라고 확신해 보셨습니까? 어떤 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며 성경구절을 뽑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아무 곳이나 펼쳐서 읽는 것입니다. 마치 우연히 펼쳐서 나온 구절이 지금 나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받는 것입니다. 완전히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물론 아주 특별한 경우에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식적이고 올바른 방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필요할 때 갑자기 그 말씀이 떠오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주 특별한 경우에 그럴 수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다. 일상에서도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기해야 적절한 하나님의 말씀이 기억날 것입니다. 성경읽기에 ‘체화’(Embodiment)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말씀을 살아낸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저 글자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구현되고,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그저 지식이나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 안에서 몸이 되고, 살과 피가 되는 것입니다. 이 체화를 우리가 적용해본다면 우리가 말씀을 읽고 말씀 대로 살아서 그것을 그대로 경험해야만 더 잘 기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갖고 그 말씀이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와 힘이 될 것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유다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돌보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것으로 그들에게 힘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 말씀을 통해서 힘을 얻어 다시 성전을 건축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의 돌보심을 느껴본 적이 없으신가요? 하나님께서 지금 잘 못 돌보고계신 것처럼 생각이 되나요?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성경을 펼쳐야 합니다. 무너진 성경읽기와 묵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진실한 마음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실하게 우리를 돌보시는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성전이 왜 무너졌었나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니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말씀대로 신실하게 일하시고, 돌보고 계시는데 말씀을 떠난 백성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떠난 백성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떠났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눈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아뢰고 그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더라”(스 5:5). 여기에 하나님의 돌보심을 발견합니다. 영어성경에서는 “그들의 하나님의 눈이 유다의 장로들 위에 있었다”(The eye of their God was on the elders of the Jews)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눈이 위에 있었다”라는 표현입니다. 히브리어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이 그들 위에 있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저 눈으로 지켜만 봤다는 의미보다 그들을 관심있게 주목하여 보고, 악한 세력이 그들을 해치지 못하도록 보호하시고 지키셨다는 뜻입니다. 비슷한 표현이 신명기에도 나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신 11:12). 연초부터 연말까지, 어디 한 해만 하나님께서 돌봐주시겠습니까! 한 해가 마치면, 또 다른 새해에도 새롭게 항상 영원토록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돌보십니다.
거꾸로,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었다면 성전은 재건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로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성전 건축이 중단된 채로 남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또 우리의 생각으로는 성전이 중단되는 문제 앞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신실하게 일하셨습니다. 포로기 가운데서도,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가운데서도, 성전 건축이 중단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돌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일하심과 돌보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돌보시기를 간절히 바라야 합니다.
나가기: 하나님의 종
이런 하나님의 돌보심을 깨닫고 고백한 사람들의 반응이 이렇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우리는 천지의 하나님의 종이라 예전에 건축되었던 성전을 우리가 다시 건축하노라 이는 본래 이스라엘의 큰 왕이 건축하여 완공한 것이었으나”(스 5:11). 이 구절은 방해꾼들의 글이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자신들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포로가 된 지 70년이 지났기 때문에 이미 한 세대가 지났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억울하지 않았겠습니까! 어떤 이는 유다가 아닌, 바사에서 태어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어렵고 힘든 과정들을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고백합니다.
여기 신앙고백에는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담겨 있습니다. ‘천지의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성전을 다시 건축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천지의 하나님, 하늘과 땅의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땅의 그 어떤 왕도, 심지어 바사 왕도 하나님 보다 높지 않다는 것입니다. 왕의 명령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고, 자신들은 종이라고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천지의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무엇으로 천지를 창조하십니까?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르시되”라고 말씀하시면 있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십니다. 무엇으로 부르십니까? 말씀으로 부르십니다. “아담아!”, “모세야!”, “아브라함아!”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아시고, 그 이름을 부르십니까? “너는 이름이 뭐였더라?”, “네 이름을 다시 한번 알려 줄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모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지 않으면 부르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돌보시기 때문에 그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회개를 촉구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실 때도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성령이 마가의 다락방에 역사할 때에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설교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의 돌보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씀 앞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중단된 성전처럼 혹시 우리의 믿음도 중단되어 회복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삶의 문제가 마치 성전 건축이 중단되었던 것처럼 다가오지 않습니까? 무엇으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돌보신다고 고백하며 간증하는 믿음의 백성되기를 축원합니다. 삶의 어떤 문제와 위기 앞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와 힘을 얻고, 회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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