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박진영이 주장하는 이상한(?) 삼위일체(5)
박진영은 성부와 성자가 서로 구별되는 두 위격이라는 데서 멈추지 않고, 한 하나님이 아니라 두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두 하나님’이라고 말하는가? 그가 제시하는 기준은 ‘혼(soul)’이다. 존재를 구별하는 최소 단위는 혼이며, 성부와 성자는 각자 고유한 혼과 뜻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에 두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는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신 장면을 근거로, 아들이 자기 뜻을 아버지의 뜻에 맞추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순종’이라고 설명한다. 두 사람이 각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 서로 뜻을 맞추듯, 성부와 성자도 그렇다는 것이다. 매우 직관적이고 쉬운 설명이다. 그러나 이 쉬운 설명 속에 치명적인 오류가 숨어 있다.
첫째, ‘혼’은 피조된 인간을 설명하는 틀이지, 창조주 하나님을 재는 잣대가 아니다. 박진영의 삼위일체 설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뼈대가 인간을 영과 혼과 몸으로 나누는 인간론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을 설명하는 세 가지 부품으로 하나님을 조립하고 있는 셈이다. 먼저 그는 ‘혼’을 한 존재를 세는 기준으로 삼는다. 사람마다 혼이 하나씩 있듯, 성부에게도 혼이 있고 성자에게도 혼이 있으니 두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몸’으로 두 분을 구별한다. 그에 따르면 성자는 원래 혼으로 성부 안에 계시다가, 창조 이전의 태초에 몸을 받아 ‘태어나셨다’. 몸이 없는 성부와 몸을 받은 성자, 이것이 두 분의 차이라는 것이다. 이는 영원전부터 계시다가 2천 년 전 마리아에게서 나신 성육신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영’은 성령의 자리가 된다. 성령은 따로 혼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 곧 아버지가 일하시는 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은 인간의 의식(혼)을, 성령은 무의식(영)을 돕는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혼과 몸과 영을 하나씩 배치하고 나면, 남는 것은 한 분 하나님이 아니라 혼을 가진 두 하나님과 그분들의 영일 뿐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설명은 그가 신학적 계보의 뿌리로 밝힌 스코필드와 다비에서 시작된 세대주의 전통의 삼분설적 인간 이해와 형식상 닮아 있다. 물론 그 인간론이 그의 삼위일체론에 직접 영향을 주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세대주의의 대표 문헌인 스코필드 관주성경조차 마태복음 28장 19절을 주석하며 ‘이름’이 단수라는 점에서 성부·성자·성령은 한 하나님이시며 동등하고 한 본질이시라고 가르친다는 사실이다. 삼분설을 가르친 전통조차 인간의 구조로 삼위일체를 재단하지는 않았다. 인간론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든, 피조물의 구조로 창조주를 재단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오류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요 4:24)라고 말씀하셨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하나님은 몸이나 지체가 없으신 가장 순수한 영이시라고 고백한다(2장 1항). 하나님은 혼과 몸 같은 부분들이 결합된 존재가 아니다.
둘째, 성부와 성자를 구별하는 것은 혼의 개수가 아니라 영원한 관계이며, 뜻(의지)은 위격이 아니라 본성에 속한다. 성부는 나지 않으시고,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 이 관계가 세 위격을 구별한다. 그렇다면 뜻은 어떠한가? 고대 교회는 의지가 위격이 아니라 본성에 속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본성이 하나이면 의지도 하나다. 그러므로 삼위 하나님은 하나의 신적 본질 안에서 하나의 신적 의지를 가지신다. 성부와 성자가 서로 다른 신적 뜻을 가지고 의견을 조율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라고 기도하신 그 ‘나의 원’은 누구의 뜻인가?
셋째, 겟세마네의 순종은 신성 내부의 협상이 아니라, 성육신하신 성자께서 참된 인성으로 드리신 순종이다.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680-681)는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기에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를 함께 지니신다고 고백했다. 십자가의 잔 앞에서 고뇌하신 것은 참 사람이신 예수님의 참된 인간적 의지였고, 그 인간적 의지는 성부의 뜻에 온전히 순종했다. 그러나 이것은 성부에게만 있고 성자에게는 없는 별개의 신적 의지에 복종했다는 뜻이 아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의 신적 본성을 지니시므로 하나의 신적 의지를 지니신다. 따라서 성자께서 사람으로서 순종하신 그 뜻은, 성자께서 하나님으로서 성부와 함께 영원히 원하시는 바로 그 뜻이었다. 이것이 겟세마네의 순종이다. 빌립보서 2장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분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8절)라고 말하고, 히브리서는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5:8)라고 말한다. 순종을 ‘배우셨다’는 것은 성자께서 이전에 불순종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신 성자께서 고난 속에서 순종을 실제로 수행하셨다는 뜻이다. 박진영은 인성 안에서 일어난 순종을 두 신적 인격 사이의 의견 조율로 바꾸어 읽었다. 그 결과 성육신의 신비는 사라지고 두 신이 협의하는 그림만 남는다.
넷째, 혼과 뜻으로 위격을 세는 방식은 결국 다신론적 구도로 흐르고, 복음의 핵심을 흐린다. 각자의 혼과 뜻을 가지고 서로 맞추어 일하는 존재들은 한 하나님이 아니라 뜻이 잘 맞는 여러 신들이다. 또한 겟세마네의 순종이 참 사람의 순종이 아니라면, 첫 아담의 불순종을 되돌리는 둘째 아담의 순종(롬 5:19)도 그 의미를 잃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사람으로서 우리가 드리지 못한 순종을 우리를 대신하여 드리셨다.
요컨대 성부와 성자를 구별하는 것은 혼의 개수가 아니라 영원한 위격적 관계이며, 삼위 하나님은 하나의 본질과 하나의 신적 의지를 지니신 한 분 하나님이시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두 하나님의 협상이 아니라, 성부와 동등하신 성자께서 우리를 위해 참 사람이 되시어 드리신 순종의 기도다. 하나님을 인간의 구조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쉽고 친근해 보이지만, 결국 하나님을 인간의 크기로 줄여 버린다. 다음 호에서는 예수님이 태초의 시작점에 ‘태어나셨다’는 그의 다섯 번째 주장을 살펴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