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가본것같은성지순례] 헤로디움 (Herodium)

헤로디움 (Herodium)

화산 분화구 모양의 인공산인 헤로디움은 기원전 40년 헤롯이 바대인들(Parthiahs)과 그들을 추종하는 유대인들을 유대 광야 전투에서 무찌른 곳으로, 바로 그 장소에 세워진 요새이자 여름 궁전이었다.

이곳은 예루살렘으로부터는 남쪽으로 12km, 베들레헴 근방 목자들의 들판교회로부터 남쪽으로 5km, 그리고 아모스 선지자의 고향 드고아에서 북쪽으로 약 4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베들레헴 예수님 탄생교회와 목자들의 들판교회를 방문한 다음, 광대한 유대광야에 자리잡은 헤로디움을 방문하는 것도 좋은 일정이 될 것이다.

성경에 헤롯이 여러명 등장하는데, 헤로디움을 건설한 사람은 대 헤롯(Herod the Great)으로 그가 현대 이스라엘의 관광자원들 중 중요한 여러 유적들을 남겼기 때문에 건축가 헤롯(Herod the Builder)이라고 불린다. 그가 건축, 혹은 재건축한 궁전이자 군사기지는 예루살렘, 사마리아, 가이사랴, 여리고, 마케루스, 알렉산드리움, 힐카니아, 그리고 헤로디움이었다. 이 건축물 중 헤롯 자신의 이름을 붙인 곳은 헤로디움이 유일하며, 헤롯은 그의 유언에 따라 이곳에 장사되었다고 하여 발굴팀이 약 35년 동안 찾다가 마침내 2007년 4월 27일 히브리대학 고고학자 에후드 네쩨르팀에 의해 그의 시신이 담겼던 석관이 발견되었다. 산의 중턱으로부터 정상까지의 계단은 2백개에 달한다. 헤롯이 기원전 4년 여리고에서 죽었고, 그의 시신이 담긴 관은 금침대에 얹혀져 그의 신하, 군인, 노예, 수천명의 유대인들의 행렬 속에 헤로디움으로 향했고, 이곳에 묻혔다고 요세푸스는 말한다.

기원전 37년 헤롯이 집권한 후 헤로디움을 완공하기까지 15년 이상이 걸렸다고 한다. 베들레헴 초입부터 남쪽으로 보이는 헤로디움은 1세기 당시 로마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최고로 넓은 궁전 단지로 계획이 되었으며 그 넓이는 62 에이커에 달했다. 이곳은 베들레헴 근방 유대광야에 있으며 약 4억리터의 흙을 부어 만든 인공 산이다.  산의 정상에 자리잡은 상부 궁전, 극장과 더불어 하부 궁전터에서는 정원과 두개의 수영장, 목욕탕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헤로디움 근방에는 베두인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원래 헤롯의 가문은 요단강 건너편 에돔 출신이었다.  요르단의 에돔산지 남쪽에는 향료길(Incense Route)의 중심지 페트라가 자리잡고 있다. 에돔 사람들은 나바티안 사람들보다 먼저 페트라에 거주했지만, 후에 나바티안 사람들이 페트라를 자신들의 수도로 삼았다. 낙타를 타고 다니며 대규모 교역으로 살아가던 나바티안 사람들의 주요 교역품으로 아라비아반도 남부에서 산출되는 몰약과 유향 그리고 인도에서 가져온 향신료가 있다. 이 물품들을 낙타에 싣고 네게브 광야에 위치한 자신들의 도시였던 하루자(Haluza), 맘쉿(Mamshit), 아브닷 (Avdat) 그리고 쉬브타(Shivta)를 거쳐 예루살렘에 도달한 후 해변길을 거쳐 유럽까지 진출하여 막대한 경제적 부를 이룩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왕으로 헤로디움 근방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 때, 이 향료길을 따라 동방에서 박사들이 별을 보고 찾아왔을 것이다.

헤로디움 상부궁전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마 2:1-2)

터키의 갑바도기아에는 비잔틴 시대에 그려진 세명의 동방박사 모자이크가 있다. 그들의 모습은 일반 상인의 모습이 아닌 왕이 입는 자주색 옷을 입었다. 즉 왕과 같은 자들이 향료길을 따라 동방에서 와서 헤롯에게 질문하는데,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 계시냐는 것이었다.  로마에 의해 왕으로 임명된 헤롯왕은 유대인의 왕이 어디 있냐는 소리를 듣고 크게 당황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왕과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마 2:2-3)

보통 사람은 왕을 만날 수도 앞에 설수도 없다. 일반인이 헤롯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헤롯왕과 예루살렘이 크게 소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칠십인역 다니엘서 5장 15절의 히브리어 번역 헬라어 박사(μάγοι)와 마태복음서 2장 1절의 박사는 동일한 단어이다. 다니엘서의 박사라는 사람들은 별을 연구하는 천문학자이면서, 신바벨론 제국의 황제 최측근이었다. 전승에 의하면 동방 박사들은 1세기 당시 로마의 숙적이었던 파르티아 출신이었다고 한다. 파르티아(Partia)는 성경에 바대(행 2:9)라고 알려진 곳인데, 지금의 이란과 이라크 지역을 통치하던 제국이었다. 하스모니아 시대의 마지막 왕 힐카누스의 손녀인 미리암과 결혼한 헤롯은 바대인들의 후원에 힘입은 힐카누스의 조카 안티고누스(Antigonus)에 의해 죽을 뻔했고 간신히 자신만 로마로 피신했다. 바대인과 안티고누스에 의해 헤롯은 자신의 아버지와 하나밖에 없던 형이 죽었고 자신만 이집트를 건너 로마로 피신했던 것이다. 로마의 안토니 장군에 의해 유대의 왕으로 임명된 헤롯은 아버지와 형이 죽은 사건을 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유대 땅 전역에 요새를 건축하게 되는데, 그 중의 하나가 동방의 민족들을 경계하며 유대광야를 지키는 헤로디움이었다. 동방박사들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보배함을 열어 황금, 유향 그리고 몰약을 예물로 드리고 헤롯에게 통고 없이 고국으로 돌아갔다 (마 2:11-12).

자신의 왕좌를 지키기 위해서 혈육과 어린 아이들도 살해하기 거리낌없던 헤롯은 비참하게 죽어서 헤로디움에 묻혔다가, 서기 135년도 바르코크바 유대인 반란 때 그의 무덤도 파괴되었지만,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 이 세상을 주관하고 계시는 것이다.

헤롯무덤과 헤롯디움

사진, 글_ 이호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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