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교계뉴스캐나다뉴 브런스윅 도서관에서 언더우드를 다시 만나다_박태겸 목사 (캐나다동신교회/ KPCA 총회장)

뉴 브런스윅 도서관에서 언더우드를 다시 만나다_박태겸 목사 (캐나다동신교회/ KPCA 총회장)

뉴 브런스윅 도서관에서 언더우드를 다시 만나다

박태겸목사 (캐나다동신교회/ KPCA 총회장)

이번 여름 휴가로 지난 주간 뉴욕을 방문했다. 여느 때와 같이 나의 휴가는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나는 아내와 함께 목회상담 학회가 열리는 뉴욕 에디슨의 뉴브런스윅 도서관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나는 신학교 도서관에 오면 가장 행복해진다. 어릴 적 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 처럼 평안하다.  장신대와 연신원의 기숙사 생활을 5년간 하면서 도서관이 나의 공간이 되었다. 뉴브런스윅 대학 도서관은 방학 기간이라 그런지 하루 종일 다른 신학생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그 넓은 도서관에 두 명의 사서와 나만 사용하게 되었다. 한 참을 앉아 책을 읽다가 뒤를 돌아보는데 언더우드 선교사의 흉상이 서 있었다. 그제서야 하나님이 나를 왜 여기 뉴브런스윅 도서관으로 인도했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150년전 1884년 뉴 브런스윅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그해 12월에 조선 선교를 떠나 다음해 185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제물포에 도착한 언더우드를 다시 만나는 기회가 되었다. 그를 보면 감격과 감사의 눈물이 절로 난다.

나는 지금 여기 150년전 그가 앉아서 신학을 공부하고 선교의 꿈을 불태웠던 자리로 인도함을 받게 되었나를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베트남 선교를 떠나기전 나는 그가 묻힌 서울 합정동 선교사 묘지를 방문하여 기도하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저를 베트남의 언드우드가 되게 해 주옵소서.” 뉴브런스윅 신학교는 화란계통의 교회 연합체가 세운 개혁교회 신학교이다. 그는 북장로교의 부름을 받고 교단 최초의 정식 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왔다. 그는 고아원을 세우고 최초의 어머니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세우고 연세대학교를 세었다. 그는 성경과 찬송을 번역하고, 조선인의 마음을 얻고 오늘의 한국 근대화의 길을 연 기독교 문화와 건강한 사회를 낳는 결정적인 공헌을 한 복음적이요 연합적이요 통전적인 선각자였다. 

나는고등학교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다가  서울에 올라와 그가 세운 연세대학원에서 한국교회사를 전공하고, 그가 설립한 최초의 한국교회인 새문안교회에서 역사를 편찬하면서 중등부 학생들을 가르쳤다. 나는 그의 신학적 사고와 사역과 비전을 접하며 학위 논문을 썼다. 내가 존경하는 캐나다 선교사 윌리암 존 맥켄지의 소래 사역와 세브란스 병원을 세운 에비슨과 토론토대학의 많은 의료 선교사들도 그의 도전과 배려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는 한국 교회 선교와 신앙의 아버지였다. 그는 유대인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한국의 크리스천과 목회자들에게 영적 지도(GPS)가 되어 한국 교회가 나가야할 방향인 예수님의 삶과 정신을 정확히 제시했다.  

그의 삶과 비교하면 나는 무엇을 남기고 살았나? 나의 후손들에게 나의 존재와 사역은 어떤 사람으로 비췰까?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한 없이 부끄러워지고 작아진다.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비전과 삶이 미래의 한국 교회 현장에서 그대로 나타나게 한 강력한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그 당시 북미 성도들의 마음을 어떻게 자극했으면, 한국 선교를 위해 그들이 그토록 헌신할 수 있도록 만들었을까?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그는 나의 마음에 깊은 영감과 통찰력을 불어넣어 나를 겸손하고 가난한 심령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위로는 고종 황제로부터 아래로 백정의 아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선교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북쪽 평양과 선천과 의주 선교로부터 서쪽의 소래교회 설립과 선교, 남쪽의 대구와 안동과 영주 등 경북지역 선교와 서울 경기의 새문안, 서교동, 김포등 교회 개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행정과 조직을 기초를 놓아 최초의 장로교 독노회를 설립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초대 총회장이 되어 한국 목사들을 배출하고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수많은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서울 정동에 정착하여 교파를 초월하여 전국으로 뻗어나가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는 교파별로 지역을 분배하여 선교가 과열되지 않토록 네비우스 방식을 채택하여 합리적이고 유용한 선교 정책을 세우는 통전적인 선교의 대부였다. 

연합정신과 애국심이 강하여 장감연합운동을 전개했고, 항일과 독립운동을 도와 조선의 자립과 한국교회의 부흥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카네기홀에서 토론토 시장이며 주치의인 토론토대학 의대 교수인 에비슨과 함께 선교보고를 할 때, 미국 석유재벌 세브란스가 감동을 받아 서울역 앞에 세브란스 병원 설립자금을 지원히였다. 무디가 주도하는 미국의 제2차 대각성운동과 학생부흥운동 (SVM)에 합류하여 뉴욕과 아틀란타와 토론토와 킹스턴 등 북미 지역을 순회하며, 수많은 목회자와 의료와 교육과 농업 선교사들을 조선 선교사로 파송하는 물고를 튼 주인공이다.  

이번에 나는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 일로 뉴욕노회(김연수 노회장)와 뉴저지노회(정석진 노회장)와 동북노회(허신국 노회장)와 뉴욕장신(김종훈 학장)을 방문했다. 이민교회의 현실을 좀더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특히 뉴브런스윅 신학교의 방문은 150년전 언더우드의 선교 비전과 헌신했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한국교회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새로운 도전을 받게 되었다. 미래 교회의 회복을 위한 길은 교파와 정치적 이기주의를 탈피하여 복음과 선교의 본질을 되찾는 가난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영성을 회복하는 길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성도들의 각성과 영적 생명이 살아야 교회와 신학교가 살아난다. 교회가 생명이 넘쳐나 이웃과 지역을 살아야 민족과 사회가 건강하게 되 살아날 수 있다. 건강한 신학적 사고가 다시 일어나야 다른 학문들을 바른 길로 걸어가게 하는 길잡이와 정화 작용을 하는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다. 지금 세상을 움직이는 시계추는 우리가 거역할 수 없는 너무나 강력한 세속화와 반기독교의 길을 걷고 있다.             

참 변화와 개혁은 크고 강한 바람처럼 일어나지 않고 작고 세미한 음성처럼 들려온다. 엘리야가 펜데믹으로 인한 낙망한 유대 사회를 회복하는 길을 어떻게 일으켰나요? 그가 로뎀나무 아래 누워 이세벨의 공격을 받아 도망쳐 죽여달라했지만, 하나님은 그가 다시 힘을 얻어 엘리사를 세우고 바알신앙을 무너뜨리고 이웃 아람 나라를 회복시키는 역사의 주인공으로 쓰임받도록 미세한 음성을 들려주셨다. 여기에 엘리야는 주저하지 않고 기쁘게 반응했다. 역사의 주인으로 성육신한 주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며 주님의 인도를 믿고 온전히 ‘오직 믿음(sola fide)과 오직 성경(sola scriptura)과 오직 은총(sola gratia)’만 의지하는 루터가 종교개혁의 주역이 되었다. 성프란체스코가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며 가난한 수도원의 영성을 일으키자 십자군 전쟁과 페스트와 절대군주 처럼 변해 모너지는 중세교회를 다시 세우는 주역이 되었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을 쓴 수도원 주방장 로렌스형제가 작은 일을 통해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행복한 사역을 통해서 가톨릭 교회를 새롭게 만드는 위대한 주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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