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희년 이야기] 삭개오(1)

[희년 이야기] 삭개오(1)

누가복음 19장의 삭개오는 여리고에 사는 세리장이요 부자이며 키가 작은 사람이다(19:1-3). 그런데 그는 예수님 보기를 간절히 원한다. 삭개오가 예수님 보기를 간절히 원했다는 사실은 그런 마음이 두 번이나 표현된 데서 잘 알 수 있다(“보고자 하되…보기 위하여”). 또한 그는 예수님이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19:5)라고 말씀하시자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한다(19:6). 이처럼 삭개오는 예수님 보기를 간절히 원하고,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한다. 삭개오가 구원을 받은 것은 그가 예수님을 향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수군거린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19:7). 그들은 삭개오를 죄인이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그런 죄인의 영접을 받는 예수님도 비난한다. 사람들의 이런 비난 섞인 수군거림에도 불구하고 삭개오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도 삭개오의 영접을 받으신다. 그리고 삭개오는 예수님께 말한다. 

“주여 보시옵소서.”(19:8). 삭개오는 예수님을 ‘주’(主, 퀴리오스)라고 부른다(19:8). 그 직전 본문의 시각 장애인도 예수님을 ‘주’(主)라고 불렀다(18:41). 이 두 사람에게 예수님은 구원을 선포하셨다(18:42, 19:9). 

주(主)라는 고백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관계의 측면에서 예수님은 주(主)이시고 자신은 종(從)이라는 뜻이다. 둘째, 소유의 측면에서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의 소유주는 자신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주(主)라고 고백한다면, 자신은 예수님의 종(從)이므로 마땅히 자신의 주(主)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그 소유주이신 예수님의 뜻에 따라 희년 정신을 실천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 데 비해, 직전 본문의 부자 관리는 예수님을 ‘선생’(디다스칼로스)이라고 불렀다(18:18). 부자 관리가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18:22)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예수님을 주(主)로 대하지 않고, 선생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그 부자 관리가 예수님을 “선한 선생”이라고 부른 데 대해, 예수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라는 말씀을 통해 우회적으로 예수님 자신이 주(主) 하나님이심을 가장 먼저 가르쳐주셨다(18:18-19).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이 자신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자신은 하나님이시라고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문맥에서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18:26)라는 질문에,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18:27)라고 말씀하신 후에,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9-10)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데, 인자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구원을 선포하며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시는 분이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럼 이처럼 예수님이 우회적으로 자신이 주(主) 하나님이심을 부자 관리에게 가장 먼저 가르쳐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을 주(主) 하나님이 아니라 선생인 사람으로 대하는 한, 그 부자 관리는 예수님의 희년 실천 명령에 순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주(主)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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