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의 만남은 치유적 만남입니까? –
오랜만에 반가운 연락을 받았습니다. 28년 만에 후배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우연히 저의 이름을 보고 용기를 내어 연락 했습니다. 후배는 개인적으로 아끼는 친구였습니다. 대학시절 어느날 갑자기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28년전에 어느 권위자 한사람 때문에 깊은 상처를 받고는 갑자기 교회를 떠났습니다. 신실한 후배이며 기도의 용사였기에 ‘어디선가 잘 살고 있겠지!’ 워낙 믿음이 좋아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리라 생각했던 친구입니다. 오랜만의 소식에 얼마나 반가왔던지요. 28년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저의 마음이 무겁고 아픈 감정이 밀려오기 시작합니다. 후배는 나이 50이 되었고 선교사로 살아왔지만… 자유함 없이 살았습니다. 선교사로, 믿음의 사람으로,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지만… 내면의 깊은 곳, 무의식속에는 관계에 대한 두려움, 긴장과 불신이 있었습니다. 28년전에 그 한사람 때문에! 내면에는 알 수 없는 분노가 올라오고… 정서적인 평안과 자유함은 순식간에 빼앗깁니다.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입니다. 한사람, 어떤 권위자로부터 깊은 상처와 가스라이팅을 받은 까닭입니다. 나름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리고는 28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트라우마의 동굴속에 갇혀 있다가 이제 트라우마의 동굴 바깥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깊은 상처와 상실, 충격적인 경험, 고통스런 기억을 트라우마라 합니다. 여러 종류의 트라우마가 있지만… 저에게는 10대때 교회성도간 다툼, 부친의 교통사고로 인한 소천, 어머니의 오랜 투병은 저의 신앙 여정의 트라우마였습니다. 이로 인해 한때 사람에 대한 불신, 하나님에 혼란스러움이 있습니다. 트라우마 경험은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크고 작은 상처와 아픔을 경험하지만…. 어떤 경험은 사람의 무의식과 감정에 큰 상흔을 남깁니다. 어떤 고통스런 경험은 인격의 그릇을 산산조각 내어버립니다. 감정은 손상되고, 인격은 파괴되고, 일상의 삶은 뒤죽박죽 혼란스러워집니다. 잊어버리고, 부인해도 끊임없이 기억의 수면위로 떠올라 현실은 과거와 뒤엉켜 버립니다. 트라우마 (충격적 상처)가 많고 오래될수록 관계는 파괴됩니다. 사람들과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갑작스런 분노와 슬픔이 유령처럼 일상에 서성입니다. 우울감과 무력감을 느끼기도 하며, 인간관계가 불편하게 느껴져 나만의 동굴 속에 나 자신을 밀어 넣기도 합니다. 사람에 대한 친밀함과 신뢰도 어렵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친밀감도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후배 역시 트라우마로 인해 특정한 사람과의 만남을 꺼려했습니다. 저에게 연락을 하기 전날에도 전문상담을 받았습니다.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이 고통스런 기억과 아픔을 직면하고 드러낸다는 것은 때로는 “목숨을 건 용기”가 필요한데… 저를 신뢰하고 나눈 친구가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치유의 과정 속에서… 고통은 묻어두는 것이 아니라 통과해야 합니다. 고통스럽다고 더 묻어버립니다. 그러나, 묻어버릴수록 상처는 곪아 터지기에 반드시 드러내서 치료해야 합니다. 고통을 드러내고, 슬퍼하고, 때로는 분노하고, 애통해야 합니다. 시편의 기자들처럼 고통스런 현실을 정직하게 직면해야 합니다. 나의 감정, 의식과 무의식까지 용기를 내어 직면하는 것이 건강한 영성입니다. 치유를 원한다면 감정의 억압은 능사가 아닙니다. 나의 깨어지고 부서진 마음을 직면하는 용기를 내야 비로서 치유가 시작됩니다. 부서진 과거의 조각들을 끌어안아야 비로서 내 안에 생각, 감정, 의지… 인격의 통합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치유의 과정 속에 나의 이야기를 진정으로 경청하며, 공감하며, 함께 울어줄 단 한 사람만 있어도 그 사람은 살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트라우마를 드러내고, 직면하고, 다루지 않으면 나를 다시 과거 속으로 가두어 버린다는 점입니다. 트라우마는 보통 무의식과 감정 속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수면 안으로 저장되기에 현실은 과장되고 감정은 왜곡되며 현실적 생각은 마비됩니다. 내면이 왜곡되고 뒤틀린 사람의 모든 관계는 깨어집니다. 트라우마로 손상된 인격은 과거에 묶여버립니다. 신앙인격의 성장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트라우마로인해 생각, 감정, 기억, 행동, 믿음이 전부 따로 놀고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십년 예수를 믿어도 자신의 믿음과 감정, 과거의 경험이 단절되고, 때로는 뒤엉켜 있기에… 신앙인격은 늘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한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지만 한사람 때문에 상처가 치유되기도 합니다. 후배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중에 함께 공감하며 슬퍼하며 성령님의 만지심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끊어졌던 과거에서 오늘의 이야기로, 기억과 감정이 다시 현실로 연결이 되고… 과거의 동굴에서 현실로 한걸음씩 나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종류의 만남이 있습니다. 정보나 성경지식을 나누는 만남이 아닌…. 어떤 만남은 마음과 마음이 만납니다. 존재와 존재로 만납니다. 성령님께서 개입하시는 만남이 있습니다. 존재에 대한 수용… 굳이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만남…. 진정한 경청과 수용이 있는 만남, 성령님이 이끌어 가시는 만남… 이것을 치유적 만남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치유적 만남을 통해 한걸음 용기를 내어 과거의 동굴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바깥에 햇살이 참 눈부시구나! 바깥 세상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아름답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이 생각보다 두렵지 않고 안전하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치유적 만남이 가까이에 있구나! 비로서 안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과거의 상처, 세상이 만들어 놓은 동굴에 갇혀 있는 사람을 바깥 세상으로 초청하고,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 할 수 있습니다.
깨어지고 망가진 세상, 폭력적인 세상속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치유적 만남, 회복의 공동체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성령님이 일하시는 교회를 통해 치유적 만남,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자체가 치유적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은혜, 무조건적 수용, 긍휼을 말하지만… 우리는 종교적 만남으로 만나고는 합니다. 교회가 영혼의 병원이라면 교회는 치유적 만남, 회복의 공동체입니다. 누군가의 고통이 전해져 올 때 진정으로 경청하며 긍휼의 마음으로 함께 할 수는 없을까요? 상처와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에게 어설픈 충고나 영적 조언따위 없이… 침묵으로 끌어안아주고 존재를 수용할 수는 없을까요? 상황에 맞지 않는 영적조언은 오히려 상처를 덫 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의사, 치유의 대가인 예수님은 많은 말, 섣부른 충고나 조언을 하지 않았습니다. 고통으로 신음하는 영혼의 아픔을 긍휼의 마음으로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우리를 치유하며 자유케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여느 때보다 폭력적이며 무정하게 돌아갑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캐나다와 한국에서, 전쟁의 현장에서…. 고통하며 신음하는 사람들은 넘쳐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고통스런 현실을 함께 직면할 용기가 있을 때… 예수님처럼 긍휼의 마음으로 동참할 때 치유와 회복은 일어납니다. 단절된 관계, 끊어진 만남이 성령안에서 다시 연결되면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성령님은 트라우마를 생각나게 하시고 드러내십니다. 직면할 용기, 존재에 대한 소망을 주시며 진정으로 자유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만이 치유와 회복의 공동체입니다.


후배와의 만남을 통해 사람은 치유자가 아니라 치유의 도구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깨어지기 쉬운 존재이기에…. 아름답지만 한없이 연약한 존재인 우리! 우리의 한계를 아시며 긍휼히 여기시는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일하실 때… 우린 다시 하나님과 사람들과 진정으로 만날수 있고 성령으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우리의 속사람 안에 일하실 때 우린 치유되며 자유하게 됩니다. 할렐루야! 우린 세상을 치유하며 회복하는 존재로 부름 받았습니다. 자유하며 자유하게 하는 한사람, 치유와 회복의 한사람, 그러한 공동체를 이루어 가시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밴쿠버 동산교회 장천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