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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Jesus, The Cross & The Gospel of the Resurrection(예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_유빌리지교회 윤재웅 목사

Jesus, The Cross & The Gospel of the Resurrection 

예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유빌리지교회 윤재웅 목사

작년, 2025년에는 대통령 선거가 한국에서 검색어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인공지능(AI) 도구, ChatGPT를 포함한 다양한 AI 툴들이 주요 검색어에 올랐습니다. 그 다음은 해외에서 활약하는 한국 스포츠 선수들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게 높았습니다. 당연히 토트넘과 LA FC 경기에 대한 검색 유입이 활발했습니다. 손흥민 선수 때문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인생의 크고 작은 고민이 생길 때 스마트폰을 통해 단순히 정보를 찾는 것을 넘어, 자아 성찰, 심리적 위안, 그리고 효율적인 삶의 방식을 검색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구글코리아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5년의 한국의 검색 트렌드는 전반적으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매뉴얼’ 성격이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먼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 해답이 많았습니다. 무력감에서 벗어나 하루를 알차게 보내기 위해 ‘하루 만 보 걷기’, ‘독서 루틴’ 등 일상의 활력을 불어넣는 리추얼(Ritual)과 규칙적인 습관에 대한 검색이 가장 많았습니다. 특히 젊은 층, Z세대는 정서적 안정과 내향성 존중, 사회적 관계에서의 에너지 관리 등 마음 건강을 지키는 방법을 자주 찾습니다. 

두번째로 관계와 미래에 대한 불안 해소에 관한 검색입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달래기 위해 사주나 명리학, 또는 특정 장소를 방문하면 운이 좋아진다는 식의 트렌드성 정보를 검색하며 심리적 위안을 얻기도 합니다. 인간관계와 연애나 결혼에 대한 고민 등 관계를 잘 하기 위한 기술을 검색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깊은 고민을 챗GPT 같은 AI에게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AI에게 “이별 후 마음가짐”이나 “직장을 옮길 때 운”을 묻는 등 상담가나 명리학자의 역할을 맡기기도 합니다.

또한 계속되는 경기 불황 속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 정부의 지원 정책 및 신청 방법을 적극적으로 검색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들은 구글을 통해서, 챗GPT 같은 AI에게 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믿음의 문제도 그중 하나입니다. 믿음이란 단어는 크리스천으로 내가 잘 알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막상 정의하기 쉽지 않은 단어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설명하는 믿음은 내가 체험한 것으로, 믿음의 일면만을 드러낼 수 있을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믿음을 갖지 못한 주변의 친구들에게 너무 쉽게 “그냥 믿어봐” 라고 얘기해 버릴 때가 많습니다. 믿음 생활을 막 시작하고 여러가지 질문에 부딪힌 친구들에게도 “의심을 버려! 그냥 믿으라”라고 얘기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 친구들이 하는 질문을 대개는 믿음이 약해진 것으로 치부해 버리곤 합니다. 

과연 믿음이라는 것이 일률적이고 획일적인 것일까요? 믿음 생활을 시작했으면 아무 의심 없이 그저 “아멘”하며 따라 가야만 하는지요? 

세상 모든 것을 포괄하는 보편적이고 최종적인 권위를 지닌 분은 우리 하나님 이십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이 땅에서 길을 찾는 크리스천의 삶을 다른 말로 구도자의 삶이라고 하는 겁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질문이 없는 구도자가 있을 수 있습니까? 

나를 돌이켜보며 나의 믿음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내가 ‘믿는’ 것 같지만, 사실 내 삶속에서 내가 만난 분들과의 관계속에서 나도 모르게 믿어진 것이 대부분입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새로 전학을 간 학교에서의 크리스천 친구들, 그걸 통해 새로 간 교회의 교회학교 선생님, 거기에 중고등부 성가대 지휘자 집사님, 목사님, 전도사님, 선배들, 친구들, 선교사님들, 결혼 후에는 자녀들을 통한 만남들, 아이들 친구 가족, 일터에서의 동료들, UBC에서 세계 각 지역에서 온 이웃들, 제가 섬기는 오리진교회, 유빌리지교회 가족들…. 셀 수 없는 만남의 축복들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내게 있는 이 믿음은 전적으로 내가 만난 분들과의 관계 ‘덕분에’ 생긴 것 아닙니까! 그래서 나와 만났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또한 믿음은 절대 강요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걸 왜 못 믿느냐’는 핀잔을 주면 안되는 겁니다. 그보다는 믿음대로 사는 내가 누군가의 좋은 이웃이,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 길 외에 믿음을 전할 다른 길이 쉽게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믿음’이라는 말 자체가 아무 관계없는 대상에게 느닷없이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모르는 사람에게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하면 ‘너나 잘 믿어’ 가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먼저는 만남을 통해 주변의 사람들에게 내가 어느정도는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관계가 형성된 후에 비로소 우리는 믿음을 얘기할 수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주일에 교회에서는 대부분 이미 하나님을 믿는 분들이 서로의 삶을 나눕니다. 사실 우리는 이 만남의 지경을 넓혀야 합니다. 주중에 만나는 사람들도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겁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말하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주중에 우리의 일터에서, 우리의 학업의 현장에서, 우리의 일상에서 세상의 소금이,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허락하신 복음을 전하는 기회는 잘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를 물질주의, 냉소주의 라고 합니다. 지금은 복음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다가가기가 너무도 힘든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중요한 겁니다. 이것이 예전보다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예수 믿고 나만 영원한 천국에 가는 것을 생각한다면 내 삶의 모습이 절대적이지 않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똑같이, 동일하게 사랑하시는 아직 예수를 모르는 친구들과 이웃들을 향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우리 일상의 삶의 모습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것의 작은 실천이 차 한잔을 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함께 공감해 주며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갖고 있는 삶의 궁극적인 질문들을 함께 나누는 겁니다.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삶의 목적은 어디일까? 

더 나은 삶은 없을까? 

나는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어쩌면 내 친구가, 이웃이 이런 삶의 궁극적인 질문들을 먼저 해 올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나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질문의 해답이 되시는 하나님을 소개하는 겁니다. 하나님으로 향하는 길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 주는 겁니다.  요한복음 14: 6 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렌즈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향하는 인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 용서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서 대신해서 죽으신 분이십니다. 이 용서에 대해서 C S 루이스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용서란 우리 삶의 나쁜 기록을 완전히 닦아서 깨끗이 지워버린 것이다. 우리가 그 용서를 받을 때 우리는 진정한 삶과 인생을 충만하게 찾게 된다.’ 

이게 바로 예수님께서 나와 우리 친구들을 위해 원하시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사함을 받고 새로운 생명으로 충만한 삶,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고 이 땅에서 그것을 누리는 삶, 그것이 바로 최고의 인생 아닙니까! 이 사실을 우리가 안다면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친구들에게 예기해 주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상 가장 유명한 분이라는 것에는 많은 분들이 동의합니다. 지금도 세계 인구의 1/3 가량인 23억명의 사람들이 그분을 믿는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위인보다 각종 예술 작품, 문학 작품에 많이 등장한 분이 예수님입니다. 타임지에서도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다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누구 실까요?’ 라고 물으면 결코 쉽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예수가 정말 실제로 존재했었다고 믿어지지 않는다’는 대답도 상당합니다. ‘여러 구원자 중 한사람이 아닐까?’라고 대답하기도 합니다. ‘굉장히 멋진 사람이고 오래 전에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조언을 해준 사람인데 거기서부터 눈덩이처럼 마구 부풀려져서 신이 되었다’라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어째튼 이런 친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바르게 이해시켜 주어야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데까지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먼저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필요한 겁니다. 납득이 갈만한 증거를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친구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여러 방법들이 있겠지만 크리스찬니티를 수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과학적으로 입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에게 과학은 참 중요합니다. 여러 종류의 문제에 대한 답을 주어 왔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언제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에 대해 과학자들이 답을 줄 수 있습니다. 여러가지 방법들을 통해 연대를 측정해 낼 수 있고 가설을 통해 어느 정도의 답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 이 지구를 만들었는지에 대해 과학자들은 우리 인간에게 답을 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저 우연히 진화되고 우연히 발전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오류를 진리처럼 주장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한 해답은 만드신 분에게 물어봐야 하는 겁니다. 누가 이 세상을 만들었고 왜 만들었는지는 오직 창조주만이 드러낼 수가 있는 겁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진리는 창조주가 이 모든 것을 만들었고 그가 자신을 드러 내셨다는 겁니다. 그 창조주 하나님은 바로 인간이 되신 예수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이 사실에는 분명한 증거가 있습니다. 확실한 역사적인 증거들을 통하여 사실임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법정에서 변호사나 검사가 내놓는 증거들 가운데 많은 역사적인 증거들이 있습니다. 법정에서 과거에 실제로 일어났던 사실들을 증거로 내놓는 겁니다. 판사들이 배심원들이 그 과거에 그 범죄의 자리에 없었더라도 그 역사적인 증거들을 통해 바른 판단을 하고 판결을 내리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도 역사적인 증거에 기반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성경의 역사적인 증거들을 믿지 못한다면 크리스천이 될 수 없는 겁니다. 우리 주변에는 맹목적인 믿음에서 출발한 분들도 꽤 많이 있습니다. 이분들에게 질문이 생기는 것은, 의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왜 요즘 그래’ ‘시험에 든 것 아니야’ 이렇게 대하는 것은 좋은 반응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성경의 증거를 통해 믿음이 자리를 잡아야만 크리스천으로 제대로 살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으로 믿는 믿음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크리스천의 믿음의 여정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분으로 믿는 것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으로 믿는 것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14: 6을 다시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이 말이 중요한 겁니다. 이게 Key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렌즈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으로 향하는 길인 것입니다. 

예전에 시온선교합창단과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갔을 때 생명의 Key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을 찾는 수많은 유태인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종교적인 열심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절대 가식이 아니었습니다. 강한 전통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 향하는 몸부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유태인들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를 향한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숨을 건 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렌즈를 통해서 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 

예루살렘 성안에 가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라고 표시해 놓은 곳들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Via Dolorosa! 고난의 길을 따라 걸어 가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첫번째 넘어지신 곳, 두 번째, 세 번째, 아리마대 요셉이 대신 십자가를 지기 시작한 곳, 못 박히신 곳, 장사 지낸 곳,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등등 셀 수 없는 예수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그 장소가 2000년전의 꼭 같은 장소인지 후대의 사람들이 비슷한 곳에 정해 놓은 장소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사렛의 예수가 2000년 전에 예루살렘의 그 길들을 걸으셨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어떤 역사가도 예수님께서 실존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못했습니다. 당대에도 신약성경에만 예수가 드러나 있는 게 아닙니다.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 유대의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놀라운 이적을 행한 사람 예수’라는 책에 그의 십자가 형과 부활을 기록해서 예수님의 존재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들은 크리스천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대부분의 증거들을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2000년 전의 신약성경의 기록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오랜세월 동안 내용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양식비평’ 이라는 학문 덕분에 우리는 이런 의심을 해소할 수가 있습니다. 양식비평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F J A Hort 교수는 ‘결론적으로…현재까지 남아있는 증거들의 다양성과 충분성을 살펴볼 때 신약성경의 텍스트는 고대 산물들 사이에서 절대적이고 비교 불가능한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고 얘기합니다. 결국 믿지 않는 역사가들 가운데 그 누구도 Hort교수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증거들을 통해 우리는 예수가 2000년전에 실제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몸을 가졌고, 먹었고, 마셨고, 땀 흘리셨고, 피곤하셨고,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사랑, 기쁨, 슬픔…. 사람의 감정을 가지셨습니다. 우리처럼 가족 안에서 성장하셨고, 배우고, 일하고, 유혹을 당하고 주변의 사람들이 죽는 경험과, 고통과, 고문, 죽음의 경험을 하셨습니다. 이 증거들은 예수가 실제로 존재했던 진짜 사람이었음을 충분히 설명해 줍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가 실존했던 사람으로서 위대한 선생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증거로 나타내야 합니다. 

당대의 대부분의 종교 선생들은 그들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나를 보지 말고 저 신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의 가르침은 그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되신 예수는 하나님을 가리킬 때도 자기 자신을 통해 하나님을 보라고 하십니다. ‘나를 봐라, 내게로 오라’ 요한복음 6:35 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가 영적인 굶주림을 채워줄 바로 그다라는 겁니다.

요한복음 8:36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마태복음 11:28 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걱정, 근심, 죄책감, 두려움…이런 무거운 짐을 가지고 내게 오라 내가 쉼을 주겠다. 해결을 주겠다.

마태복음10:40 입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나를 받아들이면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요한복음 14:9 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다.

요한복음 10:30-33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이 예수의 주장은 자기가 하나님과 같다라는 주장이었고 이것은 돌로 맞아 죽어야 하는 죄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돌을 집어 들었고 예수께서는 내가 아버지로부터 온 많은 기적을 너희에게 보였는데 그 중 어떤 기적 때문에 돌을 들었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네가 행한 기적 때문이 아니다. 네가 사람에 불과하면서 자칭 하나님이라 주장하니 그것이 신성모독이다’ 라는 겁니다. 신성모독은 돌로 맞아 죽어야 하는 죄였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주장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깜짝 놀랄만한 것이지만 아주 명확합니다. 이 명확한 주장을 통해 우리가 검증해 볼 때 오직 3가지 가능성 중의 하나입니다. 

1. 그것이 전혀 사실이 아니거나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예수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사기꾼이거나… 또는 

2.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데 그렇게 믿고 있는 환상에 빠져 있거나…이런 사람을 우리는 정신병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들이 아니면 논리적으로 한가지 밖에 남아있는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3.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겁니다. 그가 진리를 말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정신병자이거나 아주 나쁜 사기꾼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과, 예수의 삶과, 예수의 업적과, 예수의 성품과 그리고 구약의 예언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이루어지는 것들을 통해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증거들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증거들보다 더 강력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지 사흘만에 제자들은 빈 무덤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6주 동안 11회 이상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500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적도 있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어서 절망하고 있던 제자들이 갑자기 변하여 ‘예수가 부활하셨어 그분은 정말 살아계셔’라고 외치며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고문을 당하고 십자가 형을 당하고 모두 죽임을 당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들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켰던 겁니다. 그 결과로 기독교는 당대의 세계를 휩쓸고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던 겁니다. 신명기 21:23입니다.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당시 유대인들은 신명기의 기록에 따라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이며, 따라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구원자가 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갈라디아서 3:1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사도 바울은 ‘나무에 달려 죽은 구원자 예수’, 그 예수 그리스도가 저주를 받은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역설했던 겁니다. 바울은 나무에 달려 처형당한 예수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면서, 바로 그 분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요, 화목제물이요, 그리스도라고 역설했던 겁니다. 누가복음 24:46-48입니다.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사용된 “증인”은 헬라어로 “마르투스”입니다. 이 헬라어 단어에서 영어 단어 ‘martyr’가 나왔는데, 그 뜻은 “순교자”입니다. 

신약교회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 대로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증인 역할을 감당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자기 목에 칼이 들어오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몸에 불이 붙어도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담대하게 선포했던 겁니다.

그리고 이 부활의 증거는 오늘날에도 계속되어지고 있습니다. 전세계 모든 인종 가운데 출신 지역 경제적 수준 사회적 수준 교육적 수준에 상관없이 23억의 인구가 예수를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예수의 가르침과 삶과 인격과 성취한 예언들과 부활에 나타난 증거들을 통해 우리는 예수가 주장했던 모든 것들을 믿을 수가 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항상 자기의 인생을 위해 무언가를 찾고 있습니다. 인생에 궁극적인 의미와 목적을 제공해 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0:10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생명을 주시고 더 풍성하게 하시는 예수를 믿을 때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목적을 알게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는 그의 주장대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거기에 이 땅의 삶을 넘어서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을 위한 소망, 우리가 생명을 찾고 풍성한 삶을 살게 되는 소망도 거기에 있습니다. 

‘믿어지는’ 것과 ‘믿는’ 것은 어쩌면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믿음은 선물로 주어진 것이지만, 그 선물은 믿음을 위한 첫 걸음이지,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는 겁니다. 선물로 받은 믿음은 그것을 소중히 여기며 가꾸어 나가는 사람의 노력을 통해 성숙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이 요청되는 자리는 주일 예배 때뿐 아니라 일상을 함께 나누는 삶의 자리에서입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너무도 혼란한 세상에서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우리 믿음의 대상인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역사적인 증거가 우리의 믿음을 더 튼튼하게 해 주지 않습니까? 이 사실에 근거하여 아직 예수를 모르는 주변의 친구들에게 우리가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아니면 누가 전하겠습니까? 확실하게 알고, 믿고 전하는 삶이 됩시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사는 지구상에는 미전도종족이라 불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모르는 이유는 그들이 교회 한번도 가보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근처의 교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이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 주변에는 복음을 전할 크리스천이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듣고도 거부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한번도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모르는 것입니다.

복음은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사람들을 돌이켜 영접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사용하시는 능력입니다. 베드로전서 2:9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너희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이미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알고 있습니다. 잘 알고 있지만 문제는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삶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는 모든 도시, 모든 민족,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복음은 선포된 복음입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눈이 열리고 마음이 돌이 켜지고 또한 죄인들이 용서받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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