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교민집회를 마치면서… 오늘도 하나님 나라를 기도하다
밴쿠버 동산교회 (장천득 목사)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연어 부화장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연어를 볼 때마다 종종 깊은 상념에 빠집니다. 어쩌면 그렇게 사람의 일생과 닮았을까? 종종 사람의 일생, 이민자의 삶을 투영해 봅니다. 어린 연어 치어는 막 태어나 먹이를 찾기 시작합니다. 치어 연어는 프레이저 강변을 지나 넓은 태평양으로 나아갑니다. 드넓은 태평양에서 먹고살기 위해 애쓰며 한평생을 보냅니다. 알을 낳을 무렵에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떠올리며 다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어떤 녀석은 돌아오는 중 바다의 포식자에 잡아먹히기도 합니다. 고향으로 오는 길에 종종 길을 잘못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연어도 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합니다. 거친 바위와 물줄기를 가까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때로는 낚시꾼에 잡히기도 하고… 고향에 다다를 무렵이면 온몸에 피멍이 들어 푸르뎅뎅합니다. 여기저기 부딪히고 까진 탓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투를 벌이면서 왔을까요… 살아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며 감사한 일입니다. 사력을 다한 탓에 기진맥진하며 거친 호흡을 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태어난 그곳에서 알을 낳고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연어로서 일생과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인간의 일생도 동일한 것 같습니다. 아기로 태어나서 부모의 품에서 일정 기간 성장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자연스레 부모의 품을 떠나 갑니다. 자신이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길, 어떠한 일이 인생의 바다에서 기다리고 있을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인생의 바다를 항해합니다. 우리가 그랬고 우리 자녀들의 일생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넓고 거친 세상을 항해하며 세상이 얼마나 전쟁터 같은지를 배워갑니다. 종종 뜻하지 않은 일을 만나면 참 마음이 어렵습니다. 주변에 갑자기 하늘의 부름을 받는 이도 있습니다. 전쟁터 같은 넓은 바다를 항해하다 온몸에 피멍이 들기도 하고, 몸과 마음이 생존의 전쟁터에서 탈진하기도 합니다. 끝까지 완주해 목적지까지 도달한다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지난 한 주간 미국의 뉴잉글랜드, 코네티컷에서 말씀 사경회를 인도했습니다. 주의 은혜로 복음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 자체가 선명하게 전달되고 성령께서 깨닫게 하셔서 큰 은혜가 있었습니다. 3일간 “왕이신 예수(마가복음), 하나님의 비전과 스토리, 하나님의 백성의 기도, 예수를 만나 선교사가 되다. 예수를 만나 복을 누리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이 코네티컷의 한인교회는 100여 명 모이는 한어권과 영어권의 이민교회로, 하버드, 예일, 보스턴 대학 등의 중간에 위치한 한인교회로 미국과 한국의 명문대 출신 고학력자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그런데 상처와 아픔이 참 많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은 드림으로 끝이 나는데… 그 꿈을 이루어도 가정과 교회, 삶의 현장이 전쟁터인 까닭입니다. 이민자로 산다는 것, 이민교회 자체가 쉽지 않은 것, 우리 모두 잘 압니다. 고인 물과 같은 이민사회 속에서 이민자라면 누구나 맑은 물, 생수를 마시고 싶어 합니다. 자녀와의 관계적 갈등과 부부간의 예상치 못한 어려움은 풀어낼 방법이 없어 깊어집니다. 문화적 충격으로 인한 두려움, 정서적인 고갈, 재정적 불안정, 언어적 장벽과 의사소통의 어려움, 이로 인한 갈등, 교회의 내부적 어려움, 정말 기도가 아니라면 이겨내기 어렵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오늘도 교회 안에 필요하며 또 전투적인 기도가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성도들 중에는 비즈니스를 하다가 세 번이나 권총강도를 만나신 분도 있었습니다. 30여 년 세탁소를 하신 분, 여고생인 줄 알았는데 코네티컷의 공대 교수도 있었고, 미국 방산업체에서 잠수함 프로젝트를 하신 간부, 대학교 교수로 활동하시는 부부…. 수많은 삶의 군상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삶의 실존은 동일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깨어지고 망가진 세상(broken world)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아름답게 창조하신 세상과 샬롬은 죄로 인해 깨어졌습니다. 깨어지고 망가진 세상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상하고 깨어지고, 온몸과 마음에 피멍이 들고, 전쟁터에서 상처 입은 마음이 불쑥불쑥 가정과 교회에서 폭발을 합니다. 세상은 본래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사랑이 충만하도록 창조되었지만, 창조 질서와 복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깨어지고 상처 입은 심령이 되고, 목마름과 갈증을 느끼곤 합니다.
이번에 말씀 사경회의 주제는 <하나님의 비전, 하나님의 스토리>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 되시며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대다수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잘 느끼지 못하며 살아가지만,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 실존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셔야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는 주님의 통치와 다스림 속에 우리가 부름받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순간순간 누리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는 우리의 삶의 방식이며, 예수님은 이것을 복음이라고 말씀합니다.
흔히 복음을 “십자가의 복음”으로만 오해를 합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하셔서 이를 믿는 사람마다 구원받고 천국에 간다는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절반에 불과합니다. 십자가 사건이 핵심이지만 복음에 대한 절반의 설명입니다. 이번에 전한 본문 중 마가복음 전체 1~16장은 하나님 나라, 복음 전체를 전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전한 죄 용서의 복음은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 나라 복음의 관문(gateway)입니다. 복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초등 학문, 율법주의에 빠진 자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십자가 복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출생, 하나님 나라의 비유,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 기적과 치유의 사건, 왕의 귀환, 완성될 하나님 나라….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복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유앙겔리온)이라는 말은 로마제국의 통치자, 황제와 관련된 말씀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인, 불신자들도 복음(유앙겔리온)이라는 말을 이해했습니다. 마가가 복음(유앙겔리온)을 사용한 이유는 “새로운 나라”가 실제로 임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나라가 아닌, 새로운 질서와 복, 왕 되신 예수가 다스리시는 보이지 않는 나라, 영원한 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로마와 전혀 다른 질서, 구약의 율법이 완성되는 지점(십자가)에서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요 완성입니다. 오늘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땅의 어떠한 제국의 왕이나 통치자가 아닌, 예수가 왕이요 통치자임을 알리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말씀이 선포되고, 귀신이 떠나고, 질병이 치유되며,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곳마다, 예수를 구원자요 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의와 평강의 나라,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오늘도 우리는 기도하며 요청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임해서 만들어진 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인정하며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증인들의 공동체입니다. 선교(mission)라는 단어는 성경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믿음의 공동체를 세상에 보낼 때 사용되는 말은 “보냄을 받다”, Apostello(사도적)입니다. 보내심을 받은 공동체(apostolic church)를 선교적(missional)이라는 말로 사용합니다. 교회를 세상으로 “보냄받은 공동체(missional church)”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구속사가 진행되는 과정을 나눈 말이지 선교(mission)에 대한 정의(definition)가 전혀 아닙니다. 여기가 선교를 오해하는 지점입니다. 우리는 선교하면 땅끝까지 멀리 나가야 하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곳을 종종 선교지로 오해합니다. 성경에 근거한 선교(보내심을 받은 곳)는 해외가 아닌 우리의 일상입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곳에 당연히 선교사를 파송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은 일상, 가정, 직장, 사업장, 세상, 교회……입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요 삶의 현장입니다. 가정과 직장, 사업장, 예수를 알지 못하고 거부하는 곳,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곳이 주님이 우리를 보내신 곳입니다.
예수가 없는 곳이 선교지입니다. 내 안에 예수가 있다면 당신이 선교사입니다! 예수의 생명과 통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하는 곳이 선교지입니다. 예수가 있다면 당신이 선교사요, 예수가 없다면 당신이 선교지입니다. 우리가 선교사입니까, 아니면 선교지입니까? 남들을 등 떠밀어버리고 그들만 선교사라고 하면서 우리는 선교를 외면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외면하고 복음을 외면하고 죽어서 가는 천국만 떠올립니다. 성경과는 전혀 동떨어진 비복음적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의 “나라가 임하옵시고 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이 땅에 이루어지이다”를 우리는 날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죄 용서받고 죽어서 천국 가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쪽짜리 복음”이요, 달라스 윌라드가 지적한 예수의 피만 좋아하는 “뱀파이어 복음”입니다. 나의 죄를 용서받기만 구하는 복음, 하나님 나라를 잃어버린 복음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나라 복음> 중심이 아닌, 나 중심의 <내가 복음>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광에 동참하며, 예수와 더불어 창조 질서를 회복하며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신 자로서 그 아름다움과 복을 누리며, 그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벧전 2:9). 사복음서에서 예수를 만난 사람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은혜와 평강을 맛본 사람은 예외 없이 용기 있게 예수를 증언했습니다. 예수의 증인, 하나님 나라를 자랑하며 증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인교회는 이민생활, 목마른 사막 한복판에 있는 오아시스입니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은혜와 복을 누려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비전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님의 아젠다가 우선합니다. 교회는 사람의 일과 세상의 아젠다, 세상의 story로 움직여지는 곳이 아닙니다.
이번 말씀 사경회를 인도한 교회는 15년 동안 네 번째로 담임이 바뀌었습니다. 개인마다 교회마다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생활은 여전히 우리에게 위로와 행복감을 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의 존재 목적은 아닙니다. 나 하나 위로받고 행복하라고 주님의 교회를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우리가 있고…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기 위해 세상을 향해 존재합니다. 우리끼리 잘 살아보라고 생명을 내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치열한 전쟁을 치르셨고, 교회는 최후 승리를 이미 선언받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치열한 영적 전투를 합니다. 우리는 크루즈 유람선이 아닌 전투함에 탑승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치열한 영적 전쟁이 가정과 교회에서도 일어납니다. 종종 유람선으로 오해하기에 불평불만, 비난과 비판, 정죄하며 피차 치명상을 입힙니다. 바른말을 한다고 영혼을 죽이며 교회를 무너뜨립니다. 예수 믿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는 달라야 합니다.
그래서 주기도문 기도가 그렇게 전투적인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악한 자에게서 건져 달라고, 유혹에 넘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칫 주기도문을 자장가처럼, 예배를 마칠 때 의례적 기도로 마칠 때가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치열한 영적 전투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내가 복음>으로 필요 중심적 기도만 하다 보면… 필요가 사라지면 기도 역시 사라집니다. 하나님만 이용하고, 하나님도 내 삶 속에서 사라집니다.
세상살이도 전쟁이지만, 그리스도인이 싸워야 하는 영적 전투가 있습니다. 기도는 교회의 심장이요 성도들의 심장입니다. 주기도문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기도입니다. 우리를 이 지독한 영적 전쟁에서 건져달라는 절박한 기도, 전투적 기도가 주기도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기도입니다. 아군과 적군조차 구별 못해 죽고 죽이는 아군 사살(friendly killing)이 가정과 교회에서, 동역자들 사이에서 종종 일어납니다.
저는 가끔 교회가 비즈니스센터, 백화점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왕 되신 예수님은 사라지고 고객 만족(satisfaction guarantee)의 현장처럼 느껴집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이루어지고, 사명을 이루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쳐준 하나님 나라의 기도입니다.
연어도 많은 알을 낳고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죽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하나님의 비전을 두셨고… 하나님의 스토리를 만들어 가십니다. 나의 이야기, 나의 아젠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과 이야기가 이루어지고 흘러가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디에 만족이 있는가? 어디에 행복이 있는가? 잠시 느끼지만 행복의 원천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행복의 원천이십니다. 예수님이 함께하시면,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곳에 평안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뇌과학이나 정신과에서 말하는 행복은 뇌에서 도파민이 적정량 분비되는 자기만족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결핍과 부족을 느끼기에 모든 복의 근원, 생명의 원천이신 주님께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산상수훈의 8복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자에게 이러한 복(divine blessings-makarios,마카리오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한국과 미국의 명문대를 나오고 세상에서 존경받는 비즈니스와 직업을 가졌을지라도 하나님의 목적과 상관없다면, 하나님의 복이 나를 통해 흘러가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없는 행복, 하나님 없는 천국(?)은 지옥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 안에, 교회 안에 성령의 생수가 흘러가길 기도할 따름입니다. 죽어서 가는 하나님 나라가 아닌… 오늘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을 누리며, 비록 이중국적자이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신 우리 삶의 현장에서 그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도합니다. 예수의 복음과 심장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모두 선교사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며 주의 뜻(목적)이 우리를 통해 이 땅 위에 이루어지길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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