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식민화를 바라보며
지난주간 사스캐처원의 쿠아펠레(Qu’Appelle Valley)지역의 매리에벌 원주민 기숙학교 터에서 751개의 이름이 없는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채 가시기 전 지난 30일(수) BC주 크랜브룩 소재 세인트 유진 리조트 원주민 기숙학교 부지에서 182구의 유해가 또 발견되었다. 또한 캠룹스에서 215구의 이름 없는 유골이 발견되면서 기숙학교에 대한 분노가 격앙되어 있는 시점에 또 다시 발생한 일이라 원주민 사회를 동요케 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원주민들은 이를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기숙학교를 직접 경험한 원주민들은 그 당시 너무나 많은 아이들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고 증언한다. 어떻게 이런 야만적인 일들이 캐나다 내에서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일까? 왜 원주민 기숙학교를 기독교인들이 감당하게 되었을까?
식민이 곧 문명화이다.
지동설의 영향으로 바닷길을 따라 인도를 찾다가 아메리카 대륙에 다다른 콜럼버스 이하 많은 개척자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자신들이 발견한 신대륙이라고 불렀고, 그 땅에 이미 거주하고 있던 이들을 야만인(Savage)인으로 규정하면서, 이들 야만인들을 문명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문명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위 문명화란 자기 외의 타문화를 멸시하는 자문화 중심주의에서 비롯한 개념이다.
“인디언을 바꾸려면 어릴 때부터 잡아야한다. 그리고 반드시 그들 문화에서 단절시켜 문명화된 환경에 두어야한다.”라고 1879년 원주민 기술학교 보고서의 니콜라스 다비스는 말하고 있다. 유럽인들이 생각했던 문명화란 유럽인 중산층의 문화가 기준이었다. 이러한 문명화를 목적으로 정부는 1870년대부터 기숙학교를 세웠다. 물론 그 이전에도 문명화를 위한 학교들이 많았지만, 부모의 문화로 교육되기 이전, 어리면 어릴수록, 교육기간이 길면 길수록 확실한 문명화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기치 하에 4세부터 16세까지 강제적으로 아이들을 기숙학교에 입학시켰다. 물론 원주민 지역 안에는 절대 학교를 세우지 않았다.
이주한 유럽인들은 식민이라는 가장 효과적인 문명화 방식으로 야만성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상 국가는 스스로 설 능력이 없는 계급을 지속적으로 보호할 의무가 없다고 본다. 캐나다 정치 체제 안에 모든 인디언이 흡수되고, 인디언 문제나 정부 내 인디언 부서가 사라질 때까지 우리의 목표는 지속되어야 한다.” 1920년 캐나다 인디언 부서 장관 던칸 켐벨스콧의 말이다.
식민이 곧 선교이다.
19세기 초반 유럽교회는 선교의 부흥기였다. 인도 선교의 아버지인 윌리엄캐리를 필두로 하여 침례교선교회(BMS), 런던선교회(LMS), 바젤선교회, 영국성공회선교회(CMS) 등 수많은 선교단체가 창설되고 선교사가 파송되었다. 각국으로 파송된 선교사들은 훌륭한 선교의 사명을 다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유럽 식민제국주의 팽창에 발맞춰 식민지 안에 교회를 세우고 서구문화를 전파하는 이른바 ‘제국주의 사냥개’의 역할을 한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기도 했다.
당시 유럽에서 선교의 영향력을 잃어가던 가톨릭과 새롭게 선교단체를 조직한 성공회, 감리교, 장로교 등의 개혁교단은 ‘고결한 야만인(Noble Savages)’들이 많은 북미 땅을 선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야만인들을 복음화 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들을 야만의 문화에서 분리시켜 기독교 교육을 하는 것이었다. ‘식민화가 문명화’라는 캐나다 정부 정책이 ‘식민이 곧 선교’라는 유럽 교회의 목표와 맞아떨어졌다. 이들의 미션은 “아이들 안에 있는 인디언을 죽이라”였다. 그래서 교회는 정부의 지원 아래 ‘고결한 야만인들’을 복음화 하는 기숙학교를 세웠다. 기숙학교의 학생 수에 따라 정부지원금을 주었으므로, 가톨릭과 기독교 단체들은 경쟁적으로 기숙학교를 설립했고 ‘납치’라는 수단까지 쓰면서 원주민 아이들의 숫자를 늘렸다. 이렇듯 캐나다 정부는 훨씬 저렴하게 식민화를 달성하고, 선교단체는 정부 비호 아래 합법적 교세 확장과 선교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21세기 식민화
현재 캐나다 종교계에서도 원주민 기숙학교에 대해서 많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있다. 가장 많은 기숙학교를 설치했던 천주교뿐 아니라 성공회, 감리교, 장로교, 연합교단과 메노나이트 교단 등, 기숙학교를 소규모로라도 설립하고 지원했던 교단들은 잘못을 인정하는 성명서를 종종 발표하곤 했다. 이미 20여 년 전, 캐나다 어느 교단의 목회자 연합 총회에서 원주민들 초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행사를 했다. 당시 참석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 원주민들이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목회자들이 당신들 앞에 이렇게 용서를 구하니 감격스럽지 않은가?” 이에 한 원주민이 단상에 올라 목회자들을 향해 “당신들은 얼마나 우리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는가? 어떻게 미안한가?”라고 묻자 일부 목회자들은 얼굴을 붉히며 그만 하면 되었다며 언짢아했다고 한다.
기숙학교 생존자인 칠리왁 출신의 엘리노어 폴의 이야기에 따르면, 어린 시절 생활했던 기숙학교와 교회 건물에 방화가 있었는데, 아이들 어느 누구도 불을 끄려 하지 않고 오히려 환호를 보내며 박수를 쳤다고 한다. 캠룹스 기숙학교의 생존자인 데니스 새들먼은 이번 사태를 보며 괴물(Monster)라는 시를 썼다, “증오한다, 너 기숙학교여. 거대하고 굶주린 괴물, 철골 뼈와 시멘트 가죽을 휘감은 괴물, 죄 없는 원주민 아이들을 집어 삼킨 너. 시멘트 바닥처럼 차가운 심장, 사랑도 다정함도 없네. 붉은 벽돌로 옭아진 끔찍한 얼굴, 때 묻은 창 뒤에서 부라리는 너의 눈, 사악한 괴물의 눈, 수치심에 웅크린 아이들을 지켜본다. 증오한다, 너 기숙학교여.” 어린 그들의 눈에 기숙학교는 괴물 그 자체였다. 최근에도 유해가 발굴된 캡룹스 주변의 성당 건물이 방화되고, 원주민 표식인 붉은 페인트가 칠해지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정부는 분명종교단체가 학교를 운영할 당시 각종 인권유린과 폭력이 있음을 알았지만 이를 묵인하고 승인과 지원을 지속했다. 지금도 정부는 2008년 하퍼 총리시절에 공식적으로 용서를 구했다는 이유만으로, 현재 속속 드러나고 있는 원주민 기숙학교 문제를 종교단체의 책임으로 돌리기에 급급하고 있다. 또한 교회와 선교단체들은 자신들이 기숙학교를 직접 세우고 운영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모두 가톨릭 교단이 한 일인 것처럼 애써 외면하고 있다. 현재 캐나다 교회가 과거의 영적 영향력을 잃어가는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원주민의 문제에 대한 회피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캐나다의 원주민 문제는 우리 한인교회에게도 기도제목이 되어야 한다. 한인이 직접 원주민 학살에 가담하진 않았지만 우리에게는 영적인 은혜의 빚이 있다. 100여 년 전 뉴브런즈윅에서 원주민 선교를 하다가 실패한 젊은 매켄지 선교사가 조선으로 옮겨왔고, 조선인보다 더 조선인답게 살다가 순교했다. 그의 순교를 계기로 수많은 캐나다인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파송되어왔고 이는 원산 대부흥과 평양 대부흥의 불쏘시개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현재의 우리가 있는 것이다. 한국 땅에 부흥의 불길을 가져다 준 캐나다 땅이 정작 이 땅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해 말라 죽어가고 있다. 원주민과 화해하지 못하고 화해할 방법조차 알지 못하는 캐나다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이들의 손을 잡아 원주민에게로 이끄는 것이 우리 한국 교회가 캐나다 땅에 서 있는 또 하나의 사명인지도 모른다.
새몬선교회 이상열 원주민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