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칼럼박창수 목사의 희년이야기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칼럼: 희년 이야기]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의 산상수훈(마 5-7장)에 병행되는 누가복음의 본문은 바로 평지수훈(눅 6:20-49)이다. 이 평지수훈에서 예수님이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은 바로 가난한 자의 복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시고 “너희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이 본문의 ‘가난한 자’는 바로 제자들 가운데 가난한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가난한 자’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주린 자’, ‘우는 자’, ‘박해받는 자’와 평행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이 네 가지 표현들은 제자들 가운데 같은 대상을 지칭하는 다른 표현들이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먹지 못해 주리는 것이며, 또한 가난하기 때문에 가족들과 동료 제자들이 주리는 것을 보고 우는 것인데, 그 가난의 중요한 원인은 바로 “인자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박해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제자들이 가난하게 되고, 주리게 되고, 울게 되는 이유가 오직 박해 때문이라고만 여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박해는 미래의 “그 날”(눅 6:23)로 표현되어 있는데, 주리고 우는 자는 “지금”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눅 6:21, “지금 주린 자”, “지금 우는 자”). 다시 말해서 가까운 미래의 “그 날”에는 박해 때문에 제자들이 가난하게 되고 주리게 되고 울게 되겠지만, “지금” 제자들 가운데 가난하고 주리고 우는 자들이 있는 원인은 박해 때문이 아닌 것이다. 그럼 “지금” 제자들의 가난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바로 당시의 반(反)희년 체제 때문이다. 

로마에 바쳐야 하는 각종 세금도 부담이었지만 그 세금을 대리 징수하는 세리들은 그 액수보다 훨씬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해서 이득을 취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성전에서 제물을 팔고 성전세로 바칠 돈을 바꾸어 주면서 폭리를 취했다. 

이런 상황에서 흉년이라도 들면 자영 농민들은 땅을 잃고 소작 농민이나 날품팔이꾼으로 전락하거나, 더 심하면 구걸하여 연명할 수밖에 없는 거지로 몰락했다. 그리고 반대편에서는 헤롯 왕과 그 왕족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같은 부자들이 넓은 땅을 차지하면서 대토지소유제가 보편화되었다. 

그 대지주들의 가문은 오래 전부터 희년 토지법을 어기고 땅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되돌려주지 않았다. 그 결과 땅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대를 이어 가난하게 될 수밖에 없었고, 넓은 땅을 차지한 부자들 역시 대를 이어 부요하게 살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반(反)희년의 상황 가운데 예수님이 주신 가르침이 바로 평지수훈이다. 따라서 이 가르침 안에 있는 ‘가난한 자’란 바로 희년 토지법이 무너진 결과 발생한 ‘땅 없는 자’인 것이다. 

그럼 이처럼 땅 없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 가난한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땅이 없어 가난한 제자들에게 땅의 기업 대신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좋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은 한마디로 희년 세상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땅 없이 가난하여 주리고 우는 자가 배부름을 얻고 웃게 되는 것은 잃은 땅을 되찾아 가난에서 벗어날 때 이루어지는 것인데, 가난한 자가 땅을 되찾는 때는 바로 희년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난한 자에게 희년의 하나님 나라를 주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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