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년 이야기] 희년 교회와 코이노니아(8)
고후 9:13,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여기서 ‘연보’로 번역된 단어는 바로 ‘코이노니아’이다.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연보”로 번역된 헬라어는 ‘테스 코이노니아스 에이스 아프투스 카이 에이스 판타스’인데, 직역하면 “그들 안으로 또 모든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사귐(코이노니아)”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사용된 전치사 ‘에이스’는 ‘~안으로’(into)라는 뜻이다. 여기에 ‘~에게’(to, toward)라는 뜻의 ‘프로스’가 사용되지 않고, ‘~안으로’라는 뜻의 ‘에이스’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편지하면서,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작정했던 연보를 미리 준비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데, 그 연보는 단순히 돈을 나누어주는 차원의 의미가 아니라, 가난한 성도들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는 사귐의 의미라고 쓰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어주기는 하되 그 성도들의 마음 안으로는 전혀 들어가지 않는 연보가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연보가 아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올바른 연보는, 연보하는 사람이 먼저 자신의 마음 안에 가난한 사람들을 품고, 그 다음에 지극히 겸손한 마음과 공경하는 태도로 연보함으로써, 그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는 연보이다. 곧 연보하는 사람의 마음 안에 가난한 사람들이 있게 되고, 또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 안에 연보하는 사람이 있게 되는 연보가 올바른 연보인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서 마음이 하나가 되는 연보가 참된 연보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연보가 바로 ‘한 마음의 코이노니아’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방 교회들의 연보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갈 바울 자신의 섬김을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되도록 기도를 부탁한 것이다(롬 15:31). 이 기도에서 바울은 “줄 테니 엎드려 받아”라는 교만하고 고압적인 자세가 아니라 “우리가 드리는 것을 부디 받아주십시오”라는 겸손하고 공경하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바울이 원한 것은 연보를 통해, 이방 교회 성도들의 마음 안에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있게 되고, 또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마음 안에 이방 교회 성도들이 있게 되어, 서로 마음이 하나가 되는 ‘코이노니아’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 기도하신 핵심이었다.
그럼 이렇게 초대교회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 ‘코이노니아’를 계속해서 힘쓴 결과는 무엇으로 나타났는가? 바로 강력한 선교로 드러났다. 행 2:47,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가 서로를 자신의 마음 안에 품고 사랑함으로써 마음이 하나가 되고, 넉넉한 성도들이 자기 가족 몫을 초과하는 땅들과 집들을 팔아 그 값을 가난한 성도들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기를 계속해서 힘썼을 때,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게 되고 구원 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지게 되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현재 한국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과 비난을 받고 있고, 그 수가 감소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바로 희년 실천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자원적 희년 곧 코이노니아를 실천하고, 사회 안에서 제도적 희년 곧 토지평등권 개혁에 앞장선다면, 예루살렘 초대교회처럼 한국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게 될 것이며, 구원 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