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망한 삶의 태도를 버리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 위에 세워진 교회 공동체를 향한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언급하고 난 후에(엡 1:3-4:16), 의와 진리와 거룩함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실천적인 삶을 제시합니다(엡 4:17-6:20). 이러한 삶의 체계의 변화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깨달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길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먼저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허망한 삶의 태도를 버리라고 권면합니다.
(17) 그러므로 나는 주 안에서 이것을 말하고 권고합니다. 여러분들은 더 이상 이방인들이 그들의 마음의 허망한 것 안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살아가지 마십시오. (18) 그들의 지각(reasoning process)은 어두워졌으며, 그들 안에 있는 무지함과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져 있습니다. (19) 그들은 감각을 느끼지 못해서 자신들을 부도덕함에 내어주고 탐욕 안에서 온갖 더러운 일을 행했습니다. (Translated by YG Kim)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Lord) 안에서 말하고 권고하고 있는 내용은 옛 사람의 허망한 삶의 태도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한 문장 안에서 ‘말하다’라는 동사와 ‘권고하다’는 동사를 동시에 사용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일에 하나가 된 성도들에게 거룩한 삶을 살아가라고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먼저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권고하다’(martyromai)라고 번역이 되어진 헬라어 동사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중대함(solemnity)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단언하다’(affirm)는 의미이고, 두 번째 의미는 매우 중요한 일을 강하게 ‘권고하다’(urge)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깨달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실천적 삶의 태도를 매우 중요한 일로 생각하고 강력히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권고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마치 이방인들이 그들의 마음에 허망한 것을 담고 살아가는 것처럼 동일하게 살아가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우리들의 ‘마음’(nous: mind)은 무엇인가를 인식(perceiving)하고, 이해(understanding)하고, 생각(thinking)하는 것을 보관하는 장소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를 구원자로 믿는 성도들의 마음 안에 허망한 것을 담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 허망(mataiotes: emptiness)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헬라어 명사 ‘허망’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사용 가능하지 않고 가치가 없는 상태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허망이란 육체적 욕심을 위한 어떠한 행동이 아무런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는 상태로서 목적 없는(purposelessness) 삶이나, 일시적인 행동으로 의미 없는(meaningless) 삶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삶을 에베소서 2장 2-3절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바로 이 세상의 풍속을 따라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의 지배 아래에서 살아가는 삶이고, 육체의 욕심 가운데에서 육체와 마음들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를 구원자로 영접한 성도들이 허망한 삶을 살아간다고 하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옵니까?
첫째, 지각(知覺)이 어두워집니다. 우리가 ‘지각’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헬라어 명사(dianoia: intelligence)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과정(reasoning process)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허망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에서 어두워졌을 때에 그들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막 12:30)는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둘째, 무지함과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먼저 무지함(agnoia: ignorance)이란 삼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부족함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동시에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는데(엡 4:13), 허망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로부터 멀어져 있습니다. 또한 마음의 완악함(porosis: hardness)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부족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유일하신 구원 계획을 이해하지 못해서 마음이 굳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허망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의 지각이 어두워지고, 무지함과 마음의 완악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삶을 살아갈 때에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결과는 너무나도 충격적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의 결과를 두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죄에 대한 감각을 느끼지 못합니다. 성도가 죄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도 소중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죄에 대한 인식이 있을 때에 삶 속에서 거룩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향해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성도가 죄에 대한 감각이 사라지면 회개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 결과 죄로 인하여 우리들의 몸과 생각이 상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느끼지 못하고,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죄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 속량 곧 죄사함의 은혜를 경험하지도 못하게 됩니다.
둘째, 자신을 부도덕함에 내어 줌으로 인하여 탐욕 안에서 죄의 종 노릇을 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바울은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가 더 이상 그들이 죄의 종 노릇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언급합니다(롬 6:6).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처럼 탐욕 안에서 부도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심판의 날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덫(trap)에 걸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눅 21:34).
<함께 나누기>
- 바울은 성도들의 삶이 허망한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허망’이란 삶의 목적이 없고, 의미가 없는 것으로 마음 속을 가득 채웠을 때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리들은 마음 안에 이러한 모습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 사람의 마음은 텅 비어 있는 큰 그릇과 같습니다. 그 그릇 안에 우리들은 삶을 살아가면서 인식하고,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을 담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마음의 그릇 안에 예수 그리스를 담는 것이 아니라 허망한 것들을 담고 있다면 이러한 허망한 것들은 무엇입니까?
-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이 이성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면 믿음이 더욱 굳건해 지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믿음에 관하여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들의 믿음은 모양은 있지만 내용은 없게 됩니다. 우리들은 삼위 하나님의 사역에 관하여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지각이 밝아지도록 어떠한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까?
- 우리들은 믿음을 설명할 때에 이성을 뛰어 넘는 행동이라고 표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성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 위해 노력하는 행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 시작이 되어집니다. 우리들은 성경을 알아가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복음에 관하여 얕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들의 마음이 완악해 진 적은 없습니까?
-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고 있을 때에 하나님 앞에서 죄를 인식하는 것은 너무나도 소중합니다. 우리들은 얼마나 민감하게 죄에 관하여 반응하고 있습니까?
- 덫(trap)이란 살아 있는 동물을 유혹해서 사로잡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동물은 덫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탐욕이라는 덫이 죄의 종 노릇을 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을 유혹하고 있다고 하면 어떻게 반응해서 이겨낼 수 있습니까?
김윤규 목사 (토론토 쉴만한물가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