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에서 벗어나 본질을 바라보라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벳새다 건너편으로 먼저 보내셨습니다(막 6:45).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은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에서 풍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바다 위를 걸어오셔서 제자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막 6:45-52). 갈릴리 바다의 풍랑으로부터 예수님의 구원을 경험한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 북서쪽 게네사렛 땅에 도착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이곳에서 치유 사역을 하셨습니다.
(막 6:53) 그리고 그들은 [바다를] 건너 게네사렛 땅에 도착해서 [배의] 닻을 내렸습니다. (54) 그리고 그들이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즉시 그(예수)를 알아보았습니다. (55) 그들은 온 지역을 뛰어다녔고, 그(예수)가 계시다는 장소를 들은 곳마다 들것에 병든 자들을 운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56) 그래서 마을들이든 도시들이든 시골들이든 그(예수)가 들어가는 어디든지 병자들을 시장에 누이고, 그(예수)의 옷자락 가장자리만이라도 만지기를 간청하였으며, 누구든지 그(예수)를 만진자들은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Translated by YG Kim)
두 번째 짧은 배 여행의 시작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갈릴리 바다 북동쪽 벳새다 지역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갈릴리 바다 북서쪽 게네사렛 지역에 도착하였습니다. 왜 이러한 도착지의 차이가 발생했는지 추론해 보면, 지난 밤 풍랑에 의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본래의 목적지 벳새다 지역으로 가는 항로에서 벗어나서 갈릴리 바다의 북서쪽에 위치한 게네사렛 지역의 항구에 도착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게네사렛 지역에 닻을 내렸을 때 많은 사람들이 즉시(immediately)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지역을 방문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에 게네사렛 지역의 사람들은 예수님에 관한 소식은 듣고 있었겠지만, 예수님의 얼굴은 처음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게네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즉각 인식한 것은 제자들이 지난 밤 풍랑 속에서 예수님을 유령으로 바라본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에 관한 인식론적 질문과(막 6:2) 예수님의 직업과 혈통에 관한 질문으로(막 6:3) 예수님의 정체성을 부인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게네사렛 지역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한 질문보다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관한 올바른 인식을 통하여 온 동네가 축제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온 지역을 뛰어다니며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병자들을 들것에 눕혀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장소 어디든지(hopou: wherever), 예수님의 옷자락의 가장 자리라도 만지기를 원하는 누구든지(hosos: whoever) 구원을 받았습니다(막 6:56).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쳐 주시기 위해서 그의 집으로 가는 길 위에서 십 이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여인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장벽을 뛰어 넘어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사건과 유사합니다(막 5:27).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에서 능력이 나간 것을 인지하시고 이 여인을 찾아 “딸아,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평안히 가라. 그리고 너의 병으로부터 [벗어나] 건강하라”(막 5:34)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구원이 동일하게 게네사렛 지역에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인식하고 그의 옷자락을 만지는 모든 자들에게 허락되었습니다(막 6:56).
마가는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지역에서 베푸신 치유의 사건 이후에 사건의 주제를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서기관들과의 대화로 전환합니다. 마가는 지속적으로 바리새인들과(막 3:5),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과의 논쟁(막 3:20-30)을 통하여 율법의 본래적인 목적과(막 3:4) 하나님의 나라의 원칙에(막 3:23-30)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적자들로 등장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 준수에 관한 엄격한 원칙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 몇몇이 장로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음식을 먹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막 7:1)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서기관들 중에 몇몇이 그(예수)에게 모여 들었습니다. (2) 그리고 그들은 그(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몇몇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않은 손으로 빵들을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3) 왜냐하면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켜 만일 손을 정해진 방식으로 씻지 않으면 먹지 않기 때문입니다. (4) 또한 그들은 시장에서 [돌아온 뒤] 목욕하지 않으면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잔들과, 물병들과, 놋그릇들 그리고 [침상을] 씻는 다른 많은 [규례들을] 지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5)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예수)에게 질문했습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따라 행동하지 않고, 오히려 부정한 손으로 빵을 먹습니까?” (Translated by YG Kim)
모세의 율법이 성문화 되어진 미쉬나(Mishnah)의 내용 중에서 6권에 해당이 되는 정결법(Seder Tahorot)과 관련된 내용 중에서 음식을 먹기 이전에 ‘손 씻는 법’(Tahorot)과 ‘그릇을 씻는 법’(Kelim)이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대부분은 정결법에 따라서 손을 씻고 음식을 먹었지만 그 중 몇몇은(tis, tines: someone)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습니다(막 7:2).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합니다.
먼저 우리가 구약적 배경에서 정결(tahor: clean)과 부정(tame: unclean)에 관한 개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정결한 것이란 사물과 사람의 정상적인 상태이지 거룩한 상태는 아닙니다. 정결이란 부정한 것과 거룩한 것의 중간 상태입니다. 따라서 부정한 것의 반대는 정결한 것이 아니라 거룩(qodes: holiness)입니다. 정결한 것은 거룩함으로 승화될 수 있지만, 이와 반대로 부정한 것으로 더럽혀 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정결한 것이 부정한 사물에 접촉을 하면 부정하게 됩니다(레 11:39-40).
구약 성경에서 음식을 먹기 전 정결법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이 성막에서 봉사하기 전에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는 규례(출 30:17-21)는 정결과 거룩함을 위한 의식으로 해석되었고, A.D 200년경 완성된 미쉬나에서 일반적인 규례로 확장되었습니다.
미쉬나의 제 6권 정결법인 토호롯(Tahorah)중에서 ‘야다임’(Yadayim) 2.3의 내용을 보면,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을 때 손목(wrist)까지 두 번 물을 부어서 씻어야 합니다.
“If he poured the first water over the hands as far as the joint and poured the second water over the hands beyond the joint and the latter flowed back to the hands, the hands are clean.” (Mishnah Tahorah, Yadayim 2.3)
또한 장로들의 전통은 유대인들이 시장에서 돌아와 목욕을 하지 않으면 음식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막 7:4a). 그 이유는 시장에서 불특정 다수를 만나면서 부정한 사람과의 접촉을 통하여 자신이 부정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정결에 관한 법은 그릇을 씻는 법까지 확장되어져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그릇은 반드시 정한 것이어야 합니다(막 7:4b). 그릇과 관련된 내용은 레위기 11:32절의 내용이 확장되어서 장로들의 전통으로 적용된 것입니다. 레위기 11:24-45절의 내용을 보면 동물로 발생하는 부정과 이에 대한 정결의 방법을 설명하고 있는데, 죽은 동물로 초래된 부정은 일시적으로 저녁까지 지속됩니다. 죽은 동물의 사체가 나무로 만든 어떤 그릇에나, 옷에나, 가죽에나, 자루에나, 여러 가지로 쓰이는 각종 그릇에 떨어져서 닿으면 그 그릇들은 모두 부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부정하게 된 그릇을 물에 담그면 저녁까지 부정하다가 정결하게 됩니다(레 11:32).
또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침상의 부정까지 언급하는 이유는 레위기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남자와 여자의 생리적 유출과 관련된 부정을 염두에 두고 표현한 내용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러한 규례들을 제시해서 예수님의 제자들 중 몇몇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행동을 비난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정에서 분리되어서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성막을 부정하게 하는 것을 막는 행동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레 15:31).
이러한 배경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따라 행동하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빵을 먹었다고 질문합니다(막 7:5).
이러한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에 관한 장로들의 전통과 전혀 다른 입장에서 대답하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질문은 ‘음식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에 집중하고 있다고 하면,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있는 문제점을 언급하십니다.
(막 7:6) 그리고 그(예수)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에 관하여 이렇게 예언하였다. 기록된 것처럼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지만,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7) 사람들의 명령들을 [하나님의] 교훈으로 가르치면서 그들이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 29:13절의 말씀을 인용하여서 음식을 먹기 이전의 정결에 관한 장로들의 법은 레위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정결의 본래적인 의미에서 벗어나서 형식화 되어졌고, 이로 인하여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를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서 29:9-14절의 내용을 생각해 보면, 예루살렘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사 29:5-8). 그러나 그들은 세 가지 영적 분별력이 없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첫째, 예루살렘의 백성들은 영적으로 시각 장애인이 되었습니다(사 29:9).
둘째, 예루살렘의 백성들은 영적으로 통찰력을 잃었습니다(사 29:11).
셋째, 예루살렘의 백성들은 영적으로 무지했습니다(사 29:12).
결과적으로 예루살렘의 백성들은 영적 분별력이 없어서 앞을 바라보지 못하고 마치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고 비틀거리는 사람들처럼 시각 장애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위선자(hypokrites: hypocrite)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의 형식을 갖추어서 장로들의 전통을 하나님의 교훈으로 가르치면서, 하나님을 헛되이(maten: in vain) 예배하고 있었습니다.
* 다음 호에 마가복음 7:8-23절의 본문 주해가 계속됩니다.
<함께 나누기>
-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 북동쪽 게네사렛 지역에 도착하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환영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난 밤 제자들의 모습과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향 나사렛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과 어떠한 차이점이 있습니까?
- 구약 성경에서 정결이란 어떠한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까? 부정과 정결과 거룩의 개념을 설명해 보십시오.
- 율법 준수에 관한 엄격한 원칙을 가지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몇몇이 음식에 관한 정결법을 어기고 빵을 먹는 모습을 목격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라서 이러한 행동이 부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 유대인들이 시장을 다녀와서 목욕을 하는 것과, 그릇을 씻는 것과, 침상을 씻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장로들의 전통을 따라 음식을 먹지 않았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질문과 반대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핵심적인 내용은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위선자라고 언급하셨습니까?
복음에 빚진 자 김윤규 목사 (토론토 쉴만한물가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