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Ship, “ 삶의 네비게이션”
고대 사도 헌법 (The Apostolic Constitutions)은 오늘날 교회 법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사도 헌법 제 2권 57장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와 성직자에 관한 명확한 기술: 종교 예배를 위한 성직자와 평신도의 엄숙한 집회에서 특히 모든 성도가 해야 할 직무들. 당신 (성직자)이 교회 모임을 소집할 때는 큰 배의 선장으로써 회중들이 가능한 모든 재능으로 구성되도록 임명하라. 집사들에게는 항해사의 직무를 부여해서 모든 책임과 합당한 예의로 선객인 성도들을 위한 객석을 마련하게 하라.” 고대 기독교는 교회를 항해하는 배로 비유했습니다.
이런 사상은 초대 교회 교부인 터툴리안의 글에 나타날 만큼 오래되었습니다. 그는 거센 풍랑을 만났던 제자들의 배는 교회를 예표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현세인 바다에서 거세게 일어나는 파도, 즉 박해와 시련으로 제자들이 요동치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조용히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객인 성도들의 기도로 주님은 마침내 깨어나셔서 요란한 세상을 제지하시고 성도들의 삶을 평온히 회복시키십니다.
터툴리안과 동시대에 고대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던 클레멘트가 야고보에게 보냈다고 알려진 편지에도 교회를 선박으로 이해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전체로서 하나의 몸인 교회는 사나운 폭풍 속에서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큰 선박과 같다. 하나님은 선박의 주인이시고 그리스도는 선장이며 목사는 파수꾼과 같고 장로들은 선원이며 집사들은 노 젓는 사람이며 전도사들은 청지기로 비유할 수 있다.” 이런 비유는 교회가 항해하는 배처럼 세상 유혹의 급격한 물쌀에 계속 부딪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선한 사람들은 선장의 인도로 항해를 계속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선박은 고대 기독교의 상징이었습니다. 세속과 박해와 불신의 바다에 던져졌으나 마침내 인간 영혼의 화물을 싣고 안전한 항구에 도달한그것은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혹은 성 베드로가 선박의 선장으로 묘사된 (등불의 역할을 위해서 설계) 수많은 배 (ship)의 표현들이 교회사를 통해 보존되어 왔습니다. 영어권 기독교인들이 교회의 본당을 선박을 의미하는 “네이브 nave”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직도 고전적인 교회 개념을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네이브의 사전적 의미는 “The main part of the interior of a church, 교회 내부의 중심 부분.” 또는 “The center of the church 교회의 중앙”입니다. 한국말로 하면, 교회의 회중석 (신도석)이 네이브입니다. 오늘날도 영어권 기독교인들은 성도들이 예배하는 교회의 중앙 부분을 The Nave of the Church라고 부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영어 네이브가 라틴어 “내이비스 Navis”에서 왔는데, “배 ship”라는 뜻입니다. 내이비스는 배를 의미하는 희랍어 “나우스”에서 파생되었습니다. 내이비스는 줄여서 내비라고 하며 이 낱말의 전체 이름은 “항해” 혹은 “항해 술”을 뜻하는 “네비게이션 Navigation”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비라는 말은 저 넓은 바다를 배타고 항해한다는 의미입니다. 바다를 항해하는 내비가 교회의 중앙이라는 뜻으로 정착된 근거를 베드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노아의 홍수 때 노아의 가족을 구원한 방주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고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지도자였던 필로는 노아의 방주는 영혼 구원와 축복의 삶을 상징한다고 이해했습니다.
교회의 중앙이 배라는 개념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풍랑 속에 타고 있었던 배 이야기에도 나타납니다. 마가는 풍랑 만난 제자들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합니다.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비록 예수님께서 승선하셨지만 제자들이 항해하던 배는 거센 풍랑을 만났습니다. 매우 위험한 상황에 직면했지만 그들은 안전했습니다. 제자들의 배는 풍랑 가운데서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 예수님께서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풍랑 속에 다 죽었던 노아의 홍수 때, 방주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안전했습니다. 결국 홍수가 멈추고, 산자는 새로운 땅에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께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중앙에 계시는 교회는 풍랑 속에도 안전한 곳일 뿐만 아니라, 인간을 구원의 목적지로 안내하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교회는 배입니다.
14세기에 활동했던 프랑스 작가 빌벨 브리비어리 (Belleville Breviary)는 시편 69편에 삽화를 새기면서 베드로를 묵상합니다. 베드로가 폭풍에 휩싸인 배 안에 누워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으면서 축복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교회인 선박 속은 고통의 순간에 영혼의 피난처임을 상징합니다. 그 시편 한절입니다. “큰 물이 나를 휩쓸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가 내 위에 덮쳐 그것의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배의 또다른 전통적 상징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연결하는 수단입니다. 지상 생활을 순례로 여겼던 기독교 전통에서, 교회라는 배는 신자들을 세상의 바다를 통해 긍극적 목적지인 하늘 본향으로 데려다 주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인생에 관하여 깊게 묵상하고 통찰한 고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인생은 항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드넓은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풍랑을 피할 수가 없듯이, 인간 삶의 여정은 고통과 역경을 만날 수 밖에 없습니다. 풍랑은 한 개인의 인생에 위기의 순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즉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인생은 안전합니다. 예수님께서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풍랑을 만나 삶의 방향을 잃었다 해도,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인생은 바른 목적지를 향해서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 그 인생에 선장이시기 때문입니다. 내비가 운전자의 길을 인도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이 가야할 최상의 아름다운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남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