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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 그런뜻이었구나] 예언 (1),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말”

예언 (1),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말”

많은 가축들을 거느렸던 아브라함은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그랄 지역으로 이동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곳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날 밤, 그랄 땅의 왕인 아비멜렉은 종들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 오게 하여 그녀와 동침하려 했습니다. 꿈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서 “네가 데려온 그 여자 때문에 너는 죽을 것이다. 그녀는 결혼한 여자다”라고 말하셨습니다. 사라를 가까이 하지 않은 아비멜렉은 하나님께 자신의 결백을 고백합니다. “그가 ‘이 여자는 내 누이입니다’라고 말했고, 그 여자도 ‘이 사람은 내 누이입니다’라고 말해서,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이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나도 너의 결백을 안다. 네가 죄를 짓지 않기 위하여 이 여자와 동침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속히 이 여자를 아브라함에게 돌려 보내라. ‘아브라함은 선지자이니,’ 그가 너를 위해 기도하면 너는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아내를 돌려받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들을 치료하십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렸습니다.

   “예언자” 혹은 “선지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비”는 하나님과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가진 자로 하나님의 계획과 마음을 공유받는 자를 뜻합니다. 그 결과 나비의 기능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 말씀을 선포하는 대변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대언하는 자가 선지자라는 단어의 의미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람은 모세입니다.  

   애굽왕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의 해방을 알리라고 요청하는 하나님을 향하여, 모세는 자신이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다며 바로 앞에 서기를 주저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에게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고 말씀합니다. 모세가 다시 거절하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형 아론을 조력자로 세우시며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이 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모세가 아론에게 전하면, 아론은 그 말씀을 바로에게 대언합니다. 이 관계 설정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하나님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선지자가 되리라.”

   예언자는 자기 자신의 지혜나 철학을 말하는 자가 아니라, 신(神) 의 권위를 빌려 그의 말을 대신 전하는 “입”이자 “대변인”입니다. “나비”라는 어원에는 “샘솟듯 말을 쏟아내다”라는 능동적 의미와 “부름을 입은 자”라는 수동적 의미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가 쓰이는 실제 용례를 살펴보면 예언자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메시지를 강력하게 선포하는 “기능적 상태”를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 아모스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미리 알리지 않고는 결코 행하시는 법이 없다고 언급합니다. 그는 또한 예언할 수밖에 없는 선지자의 필연적인 상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선지자는 자신의 목적이나 의지에 상관없이 선포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자신을 선지자로 부르셨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예레미야는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거절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 너는 말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다 조롱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에 더 이상 예언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강권하심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는 다시 말씀을 선포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심경을 토로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오늘날 “예언”이라는 단어는 흔히 앞날을 점치는 미래학적 예견으로 오용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예언의 본질은 “미래 未來”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는 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시대의 유행이나 대중의 요구에 영합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가감 없이 선포하는 대변자였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언자는 희랍어 “프로페테스 prophetes”이고, “예언하다”는 동사형은 “프로페테우 propheteuo”입니다. 이 단어들은 “대신하여”라는 희랍어 “프로 pro”와 “말하다 또는 확언하다”는 단어 “페미 phemi”라는 두 낱말의 합성어입니다. 다시 말해, “예언자”와 “예언하다”라는 용어는 히브리어 “나비”와 동일하게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말하는 사람과 관련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예언”은 독백이나 은밀한 말이 아닌, 언제나 공개적인 선포였습니다. 따라서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사람은 누구나 “예언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델포이 신전과 같은 곳에서 신탁을 대신하여 말하는 사람들을 예언자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에게는 네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첫째, 그들은 내용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내용을 변경하지 않고 전달했습니다. 예언자 자신의 의견이 아니라 그들을 매개체로 삼는 신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요청받은 사람에게만 조언을 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님은 “포도주가 없다”는 마리아의 요청과 하인들이 예수님의 지시에 따를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구체적인 지침을 주신 것과 같습니다. 셋째, 그들은 요청자의 필요에 부합하는 조언을 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옳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요청한 사람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과 그에게 가장 절실했던 필요를 정확히 꿰뚫어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제물에 집착하던 젊은이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을 때, 예수님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우선순위 재정립”이라는 핵심을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넷째, 예언자는 특정한 이교 신이 아니라 신탁 제도에 의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언자의 권위나 정체성은 개인적인 신비 체험이나 특정 우상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의 뜻이 전달되는 “공적인 통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언은 인간의 종교적 열광이나 지적 추론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하여, 그분의 대리인으로 부름받은 자들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공회로부터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경고를 받았을 때, 그들을 향하여 당당하게 외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늘날 교회는 모욕과 박해, 심지어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선지자적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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