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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아!그런뜻이었구나] “일탈하지 않는 사람에게 정해진 몫,” 축복 (1)

“일탈하지 않는 사람에게 정해진 몫,” 축복 (1)

구약성경을 기록한 원어인 히브리어에 복을 의미하는 두 낱말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표시할 때 사용되는 “바라크”입니다. 이 단어에서 행위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복 혹은 축복으로 번역되는 거의 대부분의 단어는 바라크입니다. 바라크가 제일 먼저 언급된 곳은 창세기 1장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과 공중에 나는 새들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그 다음에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에 있는 모든 것이 완성되던 일곱째 날을 축복하셨습니다. 창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설계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복으로 번역되는 두 번째 낱말은 “야쉐레이”입니다.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을 기록할 때 쓰인 단어는 바라크가 아니라 “야쉐레”입니다. 이 단어는 “똑 바로 걸어 가다” 혹은 “탈선하지 않고 걷다”라는 동사 “아쉐르, rva” (잠 9:6)에서  파생된  단어로 “탈선하지 않고 가는 자에게 정해진 몫”이라는 의미입니다. 목적지를 향해서 이탈하지 않고 끝까지 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얻게 되는 복입니다. 야쉐레에서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의 전폭적인 은혜가 아니라 사람의 행위입니다. 복을 얻는 행위의 주체는 사람입니다. 정해진 곳을 향해서 일탈하지 않고 똑 바로 가게 되면, 그 사람은 반드시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쌓아 놓은 복이 있는 곳을 향해서 똑바로 가게 되면 그 복의 저장고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1편은 인생을 “길”로 표현합니다. 1절 중간에 “죄인들의 길”이 나타나고, 6절에는 “의인들의 길”과 “악인들의 길”이 비교됩니다. 창조 시에 닦아진 그 길을 일탈하지 않고 걷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복의 저장고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길은 어떤 길일까요? 

   야세레이가 무엇인지를 시편 1편을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이 시의 저자는 복을 만나게 되는 길을 밝히지 않고 오히려 가면 안되는 길에 대하여 먼저 설명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성경에서 악인의 대도는 의인인데,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을 의인이라 칭합니다. 악인은 사회적 개념의 죄를 범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칭하는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의인과 죄인의 구별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가 그렇지 않는가입니다. 삶의 가치  기준과 세계관이 예수 그리스도이면 의인입니다. 역으로 사람이 중심이라면 선행의 유무에 관계없이 죄인입니다. 악인들과 죄인들 그리고 오만한 자들은 모두 같은 부류의 사람들로 인간 중심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가는 인생길은 앞에 복이 준비된 길이 아닙니다.    

   시편의 저자는 2절에서 복이 기다리는 길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율법”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토라”는 사회와 집단의 질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법이 아닙니다. 인간 삶의 근본적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 토라입니다. 히브리사람들에게 토라는 복된 인생과 신앙의 질서를 안내하는 명령과 규례였습니다. 에이스라는 학자는 토라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토라는 인생의 지혜를 제공하는 것이다. 토라는 인간을 기쁘게 해 주고, 경건하게 살게 만들어 주며, 하나님의 목적대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토라를 밤낮으로 묵상하는 사람들입니다.  “묵상하다”는 단순히 말씀을 읽거나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말씀을 듣고 또 들어 그 소리들이 근육과 뼈 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게 하는 생리적인 과정입니다. 묵상은 씹는 행위입니다. 마치 소가 본능적으로 되새김질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호랑이가 먹이를 보면서 점프하기 전에 본능적으로 “으르렁”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본능적으로 씹고 또 씹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평생토록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그러면 다다르는 곳에 관해 시편 기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과실을 풍성히 맺고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땅 속에 흐르는 수맥에 나무의 뿌리가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일탈하지 않고 복을 향해 가는 길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삶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 뿌리가 보이지 않는 수맥에 닿았던 것같이 여호와의 율법에 따라 사는 사람은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복의 창고에 닿게 됩니다. 결국 그가 하는 모든 일은 형통하게 됩니다. 시편 1편은 이렇게 끝맺습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야쉐레이는 여호와께서 인정하는 길을 걷는 사람에게 정해진 몫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삶의 현장에서 충실히 적용하는 사람에게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고대 성경학자 필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올바른 행동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완벽한 것은 만물의 아버지를 내 인생의 주인 삼고, 그분을 찬양하며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고 강조합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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