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선지자 (1), 자기 탐욕에 붙잡인자
초대 교회 안에 일어난 거짓 선지자들은 순수한 신앙을 훼손하고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베드로는 이들의 심각성을 이렇게 밝힙니다.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리니 이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요.” 그 결과 교회는 예수님 가르침의 옳은 교리를 보전하고 거짓 선지자들을 내쫓기 위해 사활을 겁니다.
초기 기독교에서 사용했던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이라 일컫는 『디다케』는 거짓 선지자들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다음과 같은 규칙을 세웁니다. “영으로 말한다고 해서 다 예언자가 아니고 오직 주님의 생활 태도를 지녀야만 예언자다. 거짓 예언자와 참 예언자는 그 생활 태도로써 밝혀질 것이다.” 가르침과 행동의 일관성은 참된 선지자의 표시입니다. 자신이 전파하는 것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무엇보다도 선지자에게는 완전한 이타심이 요구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기적인 이유로 식탁을 주문한다면, 또는 개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돈 등을 요구하는 경우, 그는 거짓말하는 선지자입니다. 성경은 이런 자들의 수는 마지막 날에 더 증가할 것을 예고합니다. “마지막 날들에는 거짓 예언자들과 타락시키는 자들이 많아질 것이며, 그 때에 세상을 유혹하는 자가 마치 하나님의 아들인 것처럼 나타날 것입니다.”
훨씬 더 구체적인 내용은 초대 교회에서 입문서로 사용되었던 『헤르마스의 목자서』에 거짓 선지자에 대한 묘사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자신 안에 신성한 영의 권능이 없으므로 자신들의 심리에 따라 [그리고 자신들의 사악한 정욕에 따라] 말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그들의 영혼을 채운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은 사람에게 상의할 필요가 없고, 오직 신성의 권능을 가지고 모든 것을 스스로 말하니, 이는 위로부터 곧 신성한 영의 권능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상의를 받고 사람의 욕망에 따라 말하는 영은 세상적이고 변덕스러우며 권능이 없다. 그리고 그는 상의하지 않으면 전혀 말하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그 중 누가 선지자이고 누가 거짓 선지자인지 알 수 있는가?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시험하라. 그의 삶으로 신성한 영을 가진거 사람을 시험하라. 첫째로, 위에서 오는 [신성한] 영을 가진 사람은 온유하고 차분하며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이 현 세상의 모든 사악함과 헛된 욕망을 삼가고, 자신을 모든 사람보다 열등하게 여긴다. 그러나 세속적이고 우둔하며 능력이 없고 어리석은 영은 첫째로 자신을 높이고 뻔뻔스럽고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말이 많다. 추잡한 잔치판을 벌이고 다른 사람들을 속이면서 예언에 대한 대가로 사례를 받고, 만약 받지 않으면 예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이런 것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사악한 선지자는 세상적이다.”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기준은 순전히 삶의 태도입니다. 참 선지자는 온화하고 평화롭고 자신을 낮춥니다. 그의 삶은 모든 사악함과 헛된 욕망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는 거만하고, 야심적이며, 대담하고, 뻔뻔스럽고, 수다스럽고, 음탕하고, 사기성이 강합니다.
2세기 소아시아의 대표적인 이단이었던 몬타누스파 예언자들은 자신들을 “새 선지자”로 불렀습니다. 스스로 자신은 선지자라고 주장한 몬타누스는 갑자기 광란과 경련을 일으키며 황홀경에 빠져 예언을 합니다. 그의 말은 이상한 것이었으며 교회의 전통과 계승한 관습에 반한 예언이었습니다. 그 당시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 중 일부는 그가 악마와 오류의 영에 사로잡혀 대중을 혼란스럽게 한다고 생각하여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성령과 예언의 은사로 고양되어 예언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그의 유혹에 미혹되었습니다. 몬타누스파의 예언자들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생활 양식이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예언의 대가로 돈, 선물, 값비싼 옷을 받았으며, 심지어 가난한 과부와 고아에게서도 이것들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머리를 염색하고 , 눈꺼풀에 연필을 긋고, 장식으로 치장했으며, 도박과 주사위를 던졌습니다.
일반 사람들의 도덕적 요구 사항과 일치하지 않는 몬타누스파의 생활 양식과 그들의 황홀경 예언은 거짓 예언자임을 증명한 것입니다. 몬타누스주의자들에게서는 무엇이 진실이며 거짓인지, 무엇이 중상모략이며 실제 삶에서 일탈한 것인지를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들을 거짓 예언자로 말하는 것을 두려워 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해치고 유혹하고 그릇된 것을 예언하는 거짓 예언자들을 따랐습니다.
교회 안에 거짓 선지자들이 침투해 오지만 성도들이 아무 조치 없이 그들을 환영합니다. 바울 사도는 거짓 선지자들의 침투를 기쁘게 용납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밝힙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의 일꾼인 거짓 선지자들은 매력적이고 선한며 의로운 것처럼 자신을 가장하여 성도들을 속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교회 안에 침투해 와 거짓 예언하는 자들의 마음의 태도를 이렇게 밝힙니다.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성도들은 자신들의 이득으로 삼고,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이들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교만한 뿐만 아니라 천사들에 대해서도 욕하며 함부로 떠들어 대는 자들입니다. 그는 거짓 선지자들을 당시 사탄에 미혹되어 재물에 눈이 어두어 바른 길을 떠난 발람과 비유합니다. 유대교에서 발람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방탕함과 배교로 유혹하는 자입니다. 그는 그릇행하는 자로 시기심이 많고, 악의적이며, 탐욕적이고, 교만했습니다.
거짓 교사들의 활동이 증가했을 때, 초기 교회는 거짓 선지자들을 감지할 수 있는 일반적인 기준을 세웠습니다. 이적과 신비한 일 행함은 마지막 날의 거짓 선지자들이 유혹의 수단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공인하는 기준으로 작용할 수 없니다. 참 예언자의 전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고백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영을 알찌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셨다고 시인하는 모든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셨다고 시인하지 아니하는 모든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라.” 이웃을 나보다 높게 여기는 낮은 마음에서 나오는 삶의 양식과 태도도 참과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기준이 됩니다. 참선지자는 말과 설교보다는 겸손하며 온화하며 친절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의 외적인 경건한 차림새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없습니다. 그들의 운명은 확실합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이남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