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흔적(-The Marks of Jesus)_갈라디아서 6:17
주은혜교회 송관빈 목사
저는 어렸을 때 어머니를 배를 보면 왜 저렇게 스크레치가 나 있을까? 생각했었는데 물어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아내의 배를 보니까 비슷한 모양에 스크레치가 있는 것을 보게 되고 그것이 왜 생기게 되었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자녀를 낳기위해 10달동안 뱃속에서 키울때 배가 트면서 생기는 흔적이죠. 어른이 되고 부모가 돼 봐야만 어머니에게 있는 몸의 흔적들이 나때문에 생긴 것을 알게 됩니다. 참으로 고개를 숙여 감사할 따름인 것입니다. 자기의 몸을 아끼지 않고 몸의 흔적을 남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머니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게 몸에 남은 흔적은 부끄럽지도 수치스럽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랑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자녀를 위해서 몸에 가진 상처와 흔적은 전혀 부끄럽지 않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된 인생에 있어서 정말 자랑스러운 흔적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이 본문은 제가 정말 좋아하는 본문입니다. 왜 좋아하냐 하면요 이제 후로는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이 말 때문입니다. 날 괴롭게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이 고백을 한 것은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람들의 논쟁과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을 한 것이지만 동시에 나를 괴롭게 할 것이 없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가 자랑하고 싶었던 예수의 흔적이 무엇인지를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해서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예수의 흔적이라는 헬라어는 익숙하게 아는 단어일 수 있습니다. 스티그마”(στιγμα)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서만 딱 한번 쓰여집니다. 그 의미는 흔적으로 불로 지지는 낙인이라는 뜻입니다. 스티커 /마커스(makers)라는 단어가 여기서 유래한 단어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이 살고 있는 시대에 이 스티그마 , 낙인을 찍는 경우가 세가지 있었습니다.
첫번째 죄수와 죄인에게 스티그마라는 낙인을 찍었습니다.
이들은 얼굴이나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이 낙인을 찍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주홍글씨처럼 그래서 저주받은 사람처럼 수치를 당하게 하는 것 이였습니다. 이 낙인의 목적은 이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리고 수치를 당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들에게 자존심이 어디있습니까? 이 스티그마의 목적이 수치를 당하게 하는 것인데
이러한 스티그마의 의미가 현대적으로 해석되어서 스티그마 효과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고, 영어 표현중에도 소셜 스티그마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이 의미도 비슷한 것입니다.
도덕적으로나, 생활적으로 조금 독특하고 문제아의 성향이 있는 사람에게 문제아라는 스티그마를 찍어버리면 그 사람이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이 스티그마 효과입니다. 이 스티그마는 죄인들이 받는 것이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스티그마를 죄인이 아닌 분이 담당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이사야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지금 그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아무런 죄가 없고 흠이 없는 그분 /온 우주와 우리를 창조하시고 모든 만물을 그 발앞에 무릎꿇게 하실 수 있는 그 분이 죄인의 스티그마를 받고 수치와 조롱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어디있습니까? 어디까지 낮아지시는 줄 압니까?
이사야50: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모욕과 수치오 조롱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러셨냐구요?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우리를 위하여 모든 저주를 담당하시고 스티그마를 예수님이 담당하시므로 모든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흔적이 바로 예수의 흔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이사야서53장의 말씀처럼 그것을 귀히 여기 않습니다.
제가 전에 성경공부하면서 속량이라는 말을 정의하면서 그런 비유를 들어서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Ex] 미선, 효순이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압사 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무죄판결이 납니다. 이후 10만명의 촛불집회와 난리가 났었습니다. 이유는 죄값을 안 치루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부시대통령이 내가 너무 미안하다하고 미군 병사를 대신해서 내가 내 팔을 자르겠다! 아니면 내 아들을 대신 죽여서 그 핏값을 대신하겠다고 했다면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아이 뭐 그렇게까지야 할 필요 있냐고 했겠죠.
그런데 이것보다 더 엄청난 일이 일어 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질고와 죄인의 스티그마를 받게 하시며선 그 피로 속량했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참소와 촛불집회를 잠잠케 한 것입니다. 누가 감히 참소를 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감히 촛불집회를 할 수 있겠습니까?
지은 죄보다 훨씬 더 큰 값을 지불했기에 아무도 참소하고 불만을 제기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의 흔적때문에 사도바울은 담대히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이 예수의 사랑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나를 누가 괴롭게 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가운데 세상가운데 낙인 스티그마를 받으셨습니까? 문제아라고 낙인이 찍혔습니까? 실패자라는 낙인이 찍혔습니까? 이혼한 사람으로 낙인 찍히셨습니다. 장애와 패배자라는 낙인이 찍히셨습니까?
오늘 하나님의 아들인 무죄한 예수님이 그 모든 저주를 다 담당했다고 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임한 저주의 낙인을 대신 담당했다. 그러니 이 예수의 흔적을 붙들고 얽매이기 쉬운 모든 저주와 수치로부터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서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사탄이 감히 시비걸 수 없는 값을 지금 지불하셨습니다. 아직도 세상이 주는 스티그마로 인하여 낙담과 우울과 어둠에 짖눌려 있는 분이 계십니까? 오늘 선포하십시요: 갈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모든 저주를 담당하신 예수의 흔적을 가진 자답게 당당하고 담대하게 나오라는 것입니다.
첫번째로 나누고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의 흔적은 모든 죄와 저주와 수치를 대신 담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흔적입니다.
두번째 스티그마는 전쟁포로, 노예 그리고 가축에게 주인이 누구인지를 표시하는 낙인을 찍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자아실현을 하면 우리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인생을 이끌어 간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언가에 붙들려서 끌려가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로운 것 같지만 그것이 성공, 돈, 명예, 건강, 이데올로기, 시대정신에 붙들려 사는 것 입니다. 그리고 붙들게 없으면 갈팡질팡 하다가 결국 우상을 만들게 됩니다. 뭔가 붙들어야 될 것이 필요해서요.
이사야 44:9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무익한 것이거늘 그것들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갈라디아서5: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우리가 결국 자아실현과 자유를 추구하다고 이런 우상들을 붙들고 이런 상황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 자유 하지만 늘 우리는 무언가에 붙들려 살게 됩니다. 돈, 가족, 명예, 성공에 붙들려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는 사실, 확실한 한 명의 주인을 만나는 것이 혼란스럽지 않고 자유롭게 됩니다.
저는 35살에 결혼 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늦은 나이는 아니지만 15년 전만 해도 늦은 편이였습니다. 35살이후에 한 여인을 만나서 그 여인에게 종속되어서 살고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 묶이기 전에 삶이 더 자유로웠을까요? 한 사람에게 확실히 종속되니까 더 자유로웠을까요? 더 이상 갈팡질팡 할 필요없이 한 여인에게 종속된 자유 그것이 참된 결혼의 기쁨이듯이 인생의 주인을 만나는 것은 더 이상 혼란스럽게 갈팡질팡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갈라디아서4:3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만나기 전 내가 종노릇하고 있었던 세상의 가치와 기준과 학문들은 이제 초등학문에 불과한 것을 알게 되고 내 인생의 주인 바뀌는 순간 우리를 억압하던 것 들로부터 자유하므로 억압과 불안과 결정 장애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His Will 의 광야를 지나며 의 가사처럼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움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내 자아가 산산히 깨지고 높아지려 했던
내 꿈도 내려놓고
이 상황이 되신 분은 지금 때가 찬 것입니다. 인생의 주인이 바뀌는 타이밍!
그런데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 예수님으로 바뀌게 되면 우리는 단순히 종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음의 존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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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이 너 내꺼야라고 낙인 찍으며 종이 된 영혼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이렇게까지 이야기 해 줍니다
갈라디아서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혼돈과 확률이 지배하는 세상속에서 무엇을 따라야 할 지 고민하고 방황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리고 사람의 말, 말, 말로 지금 혼란스러운 삶의 한 가운데 계신 분들이 있다면 100% 의지하고 의존해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진리의 주인이신 주님의 스티그마 즉, 너 내꺼야라는 스티그마를 경험하시길 소원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부활이요 영광이라고 100%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님꺼라는 확실한 스티그마을 가지므로 인한 자유로 이렇게 선포하길 소원합니다.
이사야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49:16-17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
이제 후로는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두번째 나누고자 하는 것은
예수의 흔적은 주인이 없어 혼란스러운 인생에 진리이신 예수님으로 인한 자유를 체험한 흔적 입니다.
마지막 세번째 스티그마는 로마황제의 군인들중에 시저의 군인으로 평생 섬기겠다는 사람들이 스스로 찍었다는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에게는 이 고난의 낙인이 자랑인 것입니다. 내가 시저의 명예로운 군인이라는 표시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스티그마를 몸에 지니고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자원하여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을 기뻐하면서 자기 몸에 찍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 스티그마가 자기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며 가장 큰 기쁨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감히 사도바울 정도는 아니지만 이 기쁨을 조금 맛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처음 사역을 시작했던 교회는 구리 가구공장과 판매처가 있는 근처의 개척교회에서 3년반 정도를 사역했었는데 그 곳에는 외국인 근로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한 두번 사역을 내려놓고자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 수치를 당했을 때입니다. 그렇게 제가 못해먹겠다고 주님께 부르짖을 때 주님이 강력하게 말씀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네 눈물을 보았고 내 기도를 들었노라 하시며 나 때문에 수치와 조롱의 자리에 있냐? 예수님이 제 수준에 맞게 이야기 해주셨는데 나 때문에 쪼다 됐냐? 내가 그랬다! 너 때문에 너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그랬다고 나는 너가 나를 적당히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도록 알기를 원한다고 그래서 이 아픔과 고통을 내 삶에 두신다고 내가 잘 안다고 하시는 그 마음을 깨닫는 순간 다윗에게 하셨던 것처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편56:8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나님이 ‘내가 너의 기도를 듣고 너의 눈물을 보았노라 단순히 눈물을 본 것을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너와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예수의 흔적을 나누기를 원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고통의 순간이 엄청난 감격의 순간으로 바뀌어 버리게 됩니다. 세상이 알아주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모든 인생의 최고의 권위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아그립바와 왕과 베스도 총독앞에서 그 지역의 최고의 권력자들 앞에서 변론하면서 한 말입니다.
사도행전26: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사도바울에게는 최고의 권위자가 아그립바 왕이나 베스도 총독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최고 권력자이고 그 분의 흔적만을 자랑하는 내가 가장 행복한 인생이라고 그들에게 오히려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애매한 고난을 받는 것같은 분들이 있습니까? 병으로, 아니면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데 여러가지 갈등과 오해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고 계십니까?
그런 분들에게 사도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소원합니다.
갈라디아서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버전에서 예수의 흔적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The Brand marks of Jesus! 예수의 흔적이 있는 브랜드 이것이 지상 최고의 브랜드인 것입니다.
2023년 브랜드 파이넨스에서 세계 100대 브랜들을 조사했는데 그중 10대 브랜드 중
1위가 아마존 2위 애플 3위 구글 4위 마이크로 소프트이고 감격스럽게 삼성이 테슬라를 제치고 6위의 브랜드 네임을 올렸더라구요.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이 100대 브랜드의 회사를 다니는 분들도 자부심이 있을텐데 특별히 10대 브랜드에 다니는 사람들은 얼마나 자부심이 크겠습니까?
그런데 10대 브랜드중에 1000년 된 기업이 있을까요? 100년 된 것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니요 20년전만해도 코카콜라가 브랜드 네임 1위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10대 기업에도 들지 못합니다. 이렇게 빠르고 이렇게 쉽게 변하는 것이 이 브랜드 가치입니다.
그런데 20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브랜드 가치가 있습니다. 아니요 이천년 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이 브랜드 가치는 영원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The Brand marks of Jesus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고난과 어려움이 있습니까? 기뻐기뻐하십시요!
인류 최고의 브랜드 가치를 가지신 분과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26-27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세번째 나누고자 하는 것은
예수의 흔적은 고난과 역경속에서도 주님만을 자랑한 찬양을 체험을 흔적 입니다.
최고의 브랜드 가치를 가진 사람답게 즐거워하고 소리질러 외치는 찬양을 통해 참 기쁨이 충만해 지시는 저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