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시작점(열왕기하 3:1~12)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 김철운 목사
우리의 삶은 수많은 선택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루에 시작부터 “지금 일어날까? 아니면 조금 더 잘까?” 선택하게 되죠. 이런 아주 사소한 선택에서부터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는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선택의 총합이 우리 인생이라도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예전에 한 설문 조사에서 선택의 결과가 흥미로웠던 내용이 있었습니다. 빨간 버튼과 초록 버튼, 두 개의 버튼이 있습니다. 이 중에 빨간 버튼을 누르면 100% 확률로 10억을 입금해 줍니다. 아니면 초록버튼을 누르면 확률은 딱 반, 50% 확률로 1000억을 입금해 줍니다. 여러분은 둘 중의 하나의 버튼을 누르라고 한다면 어떤 버튼을 누르시겠습니까?
이 선택의 결과가 참 재미있습니다. 어떤 것을 선택할 지 물었을 때 서양인들은 100% 빨간 버튼을 누르지만, 한국인들은 대다수가 초록버튼을 선택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안전하게 10억이라도 받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의 어떤 심리 즉 우리의 마음의 움직임이나 어떤 의식의 상태에 따라 비이성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수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데 그 선택이 완벽하진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한다고 하지만, 사실상 심리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선택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선택이라는 것이 완벽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그런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선택을 해야 할 때 우리는 늘 겸손함으로, 언제라도 오류를 범할 수 있고 생각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그런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겸손이란 우리가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 우리의 연약함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묻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들어야 하고, 들은 대로 행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선택을 가장 안전하고 지혜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고 순종할 때 이것이 가장 안전한 것임을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 왕이 죽자 그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의 동생 여호람이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이때는 남유다의 왕 여호사밧이 18년째 통치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여호람 왕은 그의 아버지 아합이 만든 바알의 우상들을 철거해서 그의 부모처럼 악하지는 않았지만, 성경은 그를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를 따라 행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다’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즉 눈에 보이는 우상들은 철거하였는지 몰라도 여전히 여로보암이 저지른 우상숭배의 죄에서 돌아서지는 못했다는 말입니다.
여로보암의 죄는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쳐 그들을 타락의 길로 빠지게하고, 아무에게나 제사장의 직분을 맡기고, 절기의 날짜도 마음대로 바꾼 것이었습니다. 이 죄 가운데에서 여호람 왕은 돌아서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여호람 앞에 모압의 배신 소식이 전해집니다. 여호람은 모압의 배신 소식을 접하자마자 전쟁을 결정합니다. 바로 군사를 소집하고, 남유다왕 여호사밧에게 연합군으로 함께 가자고 청합니다. 이 모든 것이 지체 없이 아주 긴급하고 즉각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 군사행동을 결정하면서 하나님 앞에 전쟁의 출정 여부를 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게 왜 이상하냐면, 이스라엘은 신정국가입니다. 신정국가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 나라를 통치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국가의 운명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셔야 합니다. 전쟁을 할지 안 할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께 묻는 것이 먼저 였습니다.
그런데 여호람 왕은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묻지도 않고 자신이 결정해서 전쟁을 결심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여호람 왕이 이 전쟁을 결정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전쟁을 결정한 이유는 모압으로부터 받아야 할 조공, 쉽게 말하면 당연히 받아야 할 세금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4절에 의하면 모압은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조공으로 바쳐왔습니다. 이러한 모압의 조공은 북이스라엘에게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했기에 갑자기 조공을 중단한 이 사건은 어떻게 보면 북이스라엘의 경제가 흔들릴 만큼 큰 타격을 주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나라에 큰 손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하 3:7) 또 가서 유다의 왕 여호사밧에게 사신을 보내 이르되 모압 왕이 나를 배반하였으니 당신은 나와 함께 가서 모압을 치시겠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올라가리이다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으니이다 하는지라
여기 보면 여호람 왕은 자신을 지칭하는 “나를, 나와” 같은 1인칭 대명사를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이 전쟁을 선택하게 된 배경이 지극히 여호람 왕 자신의 개인적인 탐심과 감정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선택의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과 감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여호람 왕은 모압의 배반 소식을 듣고 즉각적으로 군대를 소집하고, 남유다 여호사밧 왕과 에돔 왕과 동맹을 맺고 이 연합군을 조직합니다. 8~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열왕기하 3:8) 여호람이 이르되 우리가 어느 길로 올라가리이까 하니 그가 대답하되 에돔 광야 길로니이다 하니라
(열왕기하 3:9)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과 에돔 왕이 가더니 길을 둘러 간 지 칠 일에 군사와 따라가는 가축을 먹일 물이 없는지라
여호람 왕은 모압을 공격하기 위한 루트를 결정할 때 여호사밧 왕에게 질문을 합니다. 모압을 치러 갈 때 어느 길로 가는 것이 좋겠냐는 물음이었습니다. 모압으로 가는 길은 두 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요단강을 건너 모압 북쪽으로 들어가는 길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남단을 돌아 에돔을 지나 모압 남쪽으로 들어가는 길이었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이 두 길 중 에돔 광야 길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여호사밧 왕은 이 길이 산이 많고 험난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경계가 소홀하리라 생각했고, 또 유다의 속국이었던 에돔 군대도 동참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기대했던 대로 에돔은 연합군에 합류했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 생각지 못했던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7일 동안 행군하던 중 물이 다 떨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전쟁을 해보기도 전에 전쟁을 치룰 모든 군대와 말들이 목이 말라 죽을 위기에 처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 전쟁 자체를 할 수 있을지, 아니 전쟁을 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잃어버린 절망적인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탐심으로 자기 멋대로 선택한 결과가 이렇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인간의 지혜와 여러 가지 상황을 세심하게 고려해서 신중하고 합리적으로 선택했다 할지라도 이 결정이 반드시 승리와 좋은 결과를 보장하진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전쟁의 승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호람 왕과 여호사밧 왕은 처음부터 가장 최우선적으로 하나님께 묻고 그 분께 맡겨야 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여호람 왕은 자신이 초래한 이 총체적인 위기 앞에서 뭐라고 이야기 합니까? 10절 말씀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열왕기하 3:10) 이스라엘 왕이 이르되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는도다 하니
여러분, 보통 여호람 왕 같은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세요? 자기 마음대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나서 그것이 잘 안되면 하나님 탓하고 원망하고 불평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호람 왕이 무엇이라 합니까? 하나님이 자기랑 여호사밧 왕이랑 에돔 왕을 불러 모아서 전쟁을 하라고 시켜 놓고는, 지금 모압 손에 죽게 만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슬프다고 하고 있습니다.
정말 슬프죠. 이런 존재들은요. 정말 슬픈 존재들이예요. 원칙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고도, 지금 세 나라 군대의 목숨이 한 사람의 경솔한 선택에 의해서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데, 이 상황을 만든 분이 하나님이라고, 하나님께 모든 원망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 하나님이 세 왕을 불러 모으셨나요? 언제 그들 보고 모압을 치라고 하셨던가요?
여호람 왕 스스로 하나님 앞에 묻지도 않고 한 결정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고 전쟁을 일으켜 위기를 만들어 놓고는 곤경에 처하자 엉뚱하게 지금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잠언 19장 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잠언 19:3)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여러분, 여호람 왕이 바로 그렇게 합니다. 자신의 미련함을 통해 자기 길을 굽게 하고는 결과가 안 좋으니까 마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과연 이것이 여호람 왕 뿐일까요? 이 여호람 왕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나요?
성도들과 상담을 하다보면 정말 안타까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분명히 하나님께 기도하며 먼저 묻고, 응답을 기다린 후에 응답하시면 그 때 결정해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응답이 없다고, 응답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이유 만으로 자신의 뜻대로 먼저 결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직장에 들어갈 때, 연애할 때, 어떤 사업을 결정할 때 기도하기 보다 자기 상황과 주변의 말을 통해 결정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잘 되면 아무 문제 없어요. 그런데 조금만 힘들어지면 왜 여기에 나를 보내셨냐고, 왜 이런 사람을 만나게 했냐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다 아시는 하나님이시니까 미리 가지 않게 막으시지, 상황이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었냐고 불평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권능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아니 천재이변을 일으켜서라도 여러분의 선택을 막으신다면, 과연 우리 인생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우리는 절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아니 도리어 또 막으신 것에 대해 또 다른 원망과 불평을 우리는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물어야 합니다. 언제부터요? 처음 시작부터 말입니다. 무엇을 하기 전에, 무엇인가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들으셔야 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누구인가요? 네 솔로몬 왕입니다. 솔로몬 왕이 하나님께 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보통 지혜의 왕이기에 지혜를 구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구한 것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3장 9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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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뭐라고 합니까? 솔로몬 왕이 구한 것은 정확히 듣는 마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하나님 앞에 먼저 묻고 들을 수 있는 마음이 여러분의 모든 선택과 결정의 첫 번째 요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마음대로 결정하고 선택하고 나서 축복해 달라고, 도와달라고 하지 마시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는지 먼저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응답이 여러분의 시작이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할 때 이미 그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계신다 라는 사실입니다. 11절 말씀을 보면 여호사밧 왕이 여호와께 물으려고 할 때 이스라엘 왕의 신하들 중 한 사람이 선지자 엘리사가 여기 있다고 말합니다. 그 전쟁 지역에 어떻게 엘리사가 와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할 때 그 곳에 이미 와 계셨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할 때,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묻기만 하면, 주님은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우리의 그 모든 상황 가운데 이미 와 계신 분이십니다. 지금 그 말씀이 여러분 가까이에 계십니다. 여러분 잠잠히 그 음성을 구하십시요. 이것이 여러분의 모든 선택의 시작점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선택과 결정의 시작점이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 먼저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께 듣는 것이 되게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 가운데 순종함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제발 여러분이 먼저 선택하고 결정한 후에 그것을 축복해 달라고, 도와달라고 기도하지 마시고, 먼저 그 선택과 결정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지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묻고 나아가는 그 자리에 주님께서 먼저 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응답하십니다. 그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