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섭리 아래 사는 인생_에스더 2:16-23
토론토 강림교회 김주엽 목사
(서론) 팔자가 아닌 섭리 아래 사는 인생!
최초의 미국인 교황으로 선출된 레오 14세의 형이 나눴던 어린 시절의 일화가 주목을 받습니다. 자신이 일곱 살 때, 동생인 레오 14세가 여섯 살 때 동네 아주머니가 축복한 말이 있다고 합니다. “너는 커서 장차 최초의 미국 출신 교황이 될 것이다” 라고 격려하였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보여준 로버트 프리보스트(레오 14세)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신실함도 대단하였구나 판단할 수 도 있지만, 누군가의 격려가 미래를 만들어 동력과 힘이 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가 믿은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살고 있다는 고백은 어렵고 힘든 고약한 죄악의 세상 한복판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신 뜻을 성취해 가신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는 고백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통치(신정)과 다스림이 개인의 삶과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종종 원치 않는 고난과 연단을 만날 때마다 인내와 소망으로 마음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종말을 기다리며 만납니다.
이런 믿음의 원리가운데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의 고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역사를 이와 같은 신앙고백으로 선포합니다.
(행2:23-24),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하나님은 인생 가운데 동행하시면서 당신의 방식으로 통치하시고 인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도 페르시아의 이민자들로 정착하여 자리잡고 살아가는 두 사촌의 생존 이야기이며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입니다.
(본문 설명) 성공을 위한 사촌 오빠 모르드개의 조언
에스더서의 배경은 페르시아가 중동의 강자로 지배하고 통치하던 시대를 말합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페르시아의 정치 지도자들과 주변 정세를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바벨론에서 포로로 끌려와 페르시아에서 태어난 망명자 2세, 혹은 이민자 2 & 3세로 짐작됩니다. B. C 486년, 아하수에로 왕(크세로크세스)이 그리스와 1, 2차에 걸쳐 전쟁을 벌여서 1차에서는 승리하지만, 2차에서는 대패하였지만 여전히 자신의 왕국에서는 강력한 리더쉽을 가지고 있던 시대와 상황속에 에스더는 왕비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옛날의 왕들이 그러하듯이 강력한 지도력을 가지고 있던 아하수에로 왕은 여러 여인들 가운데 왕비를 선택하는 내용들을 설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1장에 보면 와스디 라는 왕비가 왕의 선택과 명예를 저버렸기에, 그 결과로 여러 여인들을 선택한 후에 에스더가 왕비가 된다는 본문의 내용입니다. 20절에 보면 에스더는 자기 종족을 말하지 않았는데, 늘 모르드개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왔다고 설명합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사촌지간 이었지만 삼촌과 조카, 양아버지와 딸과 같이 가르치고 양육하는 사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절 끝 부분에 있는 “따름이더라”라는 히브리어가 “아사(asah)” 인데, “형성하다”, “만들어가다” 라는 뜻을 담고 있듯이 모르드개를 통하여 에스더가 인격과 믿음 됨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인생!
왜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자신의 종족과 민족을 말하지 말라고 하였을까?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에스더의 민족적, 종교적 배경을 숨기라는 권면이기도 하지만, 세상속에서 슬며 들면서 살아가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본분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위의 표현은 디트리히트 본훼퍼가 감옥 생활 끝자락에서 쓰게 된 옥중서신에서 다가오는 세상 (The Coming Age)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 유명한 표현입니다. 과학과 문명의 발전은 하나님 없는 시대의 가치관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인도자이시며 삶의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살아갑니다.”(Before God and with God we live without God.)
아하수에로 왕! 중동의 패권자이자 정복자입니다. 그리스까지 정복하려다가 실패하였지만 여전히 자신의 힘을 믿고 권력 지향적인 사람입니다.
그러한 왕이 있는 왕궁에서 암투가 벌어집니다. 치열한 정치 논리와 강한 생존의 본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공간이 왕궁입니다. 거기서 에스더는 왕후가 되었고, 모르드개는 성문 위에 앉는 사람, 성문의 출입을 관장하거나 재판의 임무를 맡은 사람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페르시아에서 태어나고 세계 정치를 움직이는 논리와 사람들을 잘 아는 무신론 혹은 다신로의 시대에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자신의 신앙과 삶을 지탱해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신앙과 삶을 굳건하게 지켜 나가며, 어떻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하며 부르심의 사명을 감당하며 살 수 있겠는가? 이것이 에스더가 주는 교훈입니다.
에스더서가 397년 갈타고 회의에서 성경 66권 중의 하나가 되는데 논쟁이 되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이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고백과 표현, 즉 예배와 기도, 율법적인 가르침을 찾아 볼 수도 없고 다만 금식 기도하는 에스더의 모습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가르친 내용은 왕국에서 처세와 출세에 관한 이야기이지, 과연 신앙의 양식을 담았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CF) 최근에 연회 참석을 위해 한국에 온 감리교회 선교사들에게 김진수 장로가 권면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선교의 자립을 위해 비즈니스를 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습니다.” 선교를 위한 비즈니스를 하지 말고, 비즈니스의 성공을 통한 삶의 방편들을 가르치고, 이러한 성공의 힘이 되고 원동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고 고백하게 하라”는 권면처럼 들립니다.
삶의 자리에서 입으로 예수를 드러내기 보다는 은은히 예수의 향기를 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오늘의 자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운데 있는 부르심의 자리입니다.
에스더 서에 나오는 또 하나의 특징은 모르드개라는 사촌 오빠의 신앙과 삶이 강조되기 보다는 그 옛날 타국에서 한 여성이 망명자의 후예로 정착하여 사는 삶의 자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에스더는 자신이 원하여 적극적인 선택으로 페르시아에 온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이유로 바벨론에서 페르시아까지 제국의 변화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문학적 요소 가운데 ‘운명의 반전’(페리페테이아, peripeteia)이라는 양식이 있다고 합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명하기를 ‘거의 일어 날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하여 급격한 방향 전환을 경험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화나 소설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콩쥐나 신데렐라와 같이 예기치 않은 사건과 만남이 운명적 사건이 되어 미래가 반전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아하수에로 왕의 암살 계획을 수포로 돌리는 모르드개의 공로는 훗날 정적이자 핍박자 하만을 제거하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의 자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요, 성실함으로 자신의 본문을 지켜야 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당장 왕으로 정치적으로 보상받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날 불면의 밤을 보내던 아하수에르 왕이 모르드개를 통해서 암살을 모면한 것에 대한 보상을 확인하면서 하만의 모략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어느 선배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권면하기를 일터에서 하나님을 이야기하면서 성실성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조심하며 멀리하는 것이 낫다고 교인들에게 가르쳤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일터에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하게 살아 계시고 내 삶을 인도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를 증거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표현하면 우리 시대는 일터의 요셉이 필요한 세대를 살고 있습니다.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창39:23절)
(결론) 부림절의 기원이 된 하나님의 구원!



SNS 에 올라 온 사진이 하나 있는데, 1940년대 오클라호마의 한 시골에서 레미콘 자동차의 전복 사고 후에 자동차는 견인할 수 있었으나 콘크리트를 가득 채운 레미콘은 옮길 수가 없어서 미술작가가 우주선 캡슐로 바뀐 이야기와 사진을 보았습니다. 쓸모없는 없는 거처럼 보이지만, 전문가의 손 길 아래 지루한 여행길에서 하나의 랜드마크가 된 것입니다.
부림(purim)절은 이스라엘의 신년, 하루카의 직전 달, 아다르 월에 있던 축제입니다. 다른 이스라엘 절기에 비해 비교적 자유롭고 소란스럽게 즐기는 세속적인 절기입니다. “푸림” 은 아람어 “푸르(pur)”에서 나왔는데 주사위, 혹은 제비뽑기 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삶의 주사위가 내 뜻대로 되지 않고 이상한 모양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섭리를 분명히 믿습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16:33)의 말씀처럼 역사의 주사위, 인생의 미래에 대한 판도는 하나님께서 선하게 이끌어 가신다는 변함없는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