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생명의 떡이라_요한복음 6.26-40
코퀴틀람 한인장로교회 김용균 목사
에고 에이미 (Εγω ειμι) 시리즈 의 첫 번째인 “나는 생명의 떡이라” 가 오늘 말씀의 주제 입니다. 영어로는 아이 엠(I am) 시리즈, 한국어로는 ‘나는 ~이다’ 시리즈가 되겠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이 참 많이 나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 왕이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등등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호칭들은 전부 인간의 입장에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예를 들어 ‘치료의 하나님’ 이라고 하면, 인간의 입장에서 우리를 치료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의 의미를 담아 부르는 호칭 정도가 되겠지요.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본질적인 정의라기 보다 인간인 우리들이 바라는 하나님의 모습을 투영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중 우리가 부르는 호칭이 아닌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알려 주신 호칭이 하나 있습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 답해주신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입니다. 영어로는 “I AM WHO I AM” 인데, 요한복음과의 비교를 위해 70인역의 헬라어 표기를 빌려오면 “에고 에이미 호 온 (Εγω ειμι ο ων)” 이 됩니다.
요한복음에도 이와 같은 계시 – 예수님께서 스스로에 대해 알려주신 일곱 번의 선포가 있습니다. 이를 보통 “에고 에이미” 시리즈, 혹은 “아이 엠” 시리즈 라고 부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스스로를 “생명의 떡” 이라고 알려 주신 요한복음 6장의 말씀입니다. 사실 생명의 ‘떡’ 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선포의 핵심과 살짝 닿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한글 성경이 번역되던 당시에는 최선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이 ‘떡’이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고자 하신 그 말씀의 뜻과는 조금 뉘앙스가 달라져 버립니다. 최근 번역되는 다른 번역들을 보면 “생명의 빵” 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생명의 양식” 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기도 하는데, 역시 만족스럽지 않거나, 어색해 보입니다.
여기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점은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 이라고 하실 때의 그 “떡”이 ‘날마다 먹어야만 하는 주식’ 이라는 것입니다. 한국식으로 하자면 ‘생명의 밥’ 쯤 되겠지만, 글쎄요 ‘생명의 밥’은 제가 보아도 참 어색한 표현입니다. 아무튼 중요한 점은 한국인들이 간식으로 먹는 ‘빵’이나 ‘떡’의 개념이 아니라 매일 반드시 먹어야 하는 ‘밥’의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평소 먹고 싶지 않을 때는 먹지 않아도 별 상관없고, 먹고 싶을 때만 먹으면 되는 간식으로서의 음식이 아니라; 매일 먹는 음식, 먹어야 힘을 얻는 음식, 때론 먹기 싫을 때에도 먹어야 하고, 매번 먹을 때마다 감사해야 하고, 먹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런 ‘밥’의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생명의 ‘떡’은 그런 의미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6-7년쯤 전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1년에 한차례 하던 정기 피검사를 하고 나서, 패밀리 닥터에게 경고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간 수치가 너무 높게 나와서 위험하다, 급성 간염일 수 있으니 관련 검사를 해보자, 만약 아니라면, 건강관리를 잘해야 하니 식이요법을 심각하게 권한다고 했습니다. 집에 가서 식이요법에 대해 알아보라고 하더군요. 간염 검사를 하고 나서 여러 가지 식이요법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세상에는 참 많은 종류의 식이요법이 있더군요. 제가 찾아 본 것만 십여 가지는 되는 것 같습니다. 그 중에는 서로 비슷해 보이는 것도 있고 반대되는 것도 있는데, 책이나 영상 등의 자료도 정말 많아서, “건강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정말 크구나” 라고 느꼈었습니다.
결과가 나왔다고 하여 다시 닥터를 만났는데 급성 간염은 아니라서 다행이라며 이제 식이요법을 하는 게 좋겠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리고는 제게 식이요법에 대해서 알아보았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알아본 여러 가지를 늘어 놓고는 오히려 제가 물었습니다. “그 많은 식이요법 중에 뭘 해야 하냐?”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닥터가 하는 말이 “아무거나 좋으니, 할 수 있는 것을 하라” 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중에 그나마 제가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것으로, 조금 쉬어 보이는 식이요법을 하나 골라서 진행했습니다. 약 3개월만에 간 수치는 정상으로 돌아와서 생각보다 좋은 효과에 놀라고 감사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사람들이 먹는 음식에 대해서 관심이 생겨서, 여러 자료들을 열심히 찾아 보았었습니다.
사람이 먹는 음식은 인체에 소화 되고 흡수 되는 과정에서 몇몇 결과물을 가져오게 됩니다. 물론 가장 큰 효과는 긍정적인 것으로, 우리 몸에 힘과 에너지를 준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움직이는 모든 에너지는 음식으로부터 얻습니다. 열왕기상 17장과 19장에 보면 엘리야도 기진맥진해서 쓰러져 있다가 음식을 먹고 나서야 힘을 내고 움직이지 않습니까? 역시 사람은 먹어야 힘이 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효과도 있습니다. 음식을 먹고 나서 대사 과정을 통해 우리 몸에는 활성산소 라는 것도 생기고 당화반응을 통해 염증이 유발되기도 해서 질병과 노화의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 몸이 음식을 소화하고 흡수하는 대사 과정을 통해, 힘을 얻지만 또 동시에 우리가 늙어가고 아프게 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은 참 충격적인 일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몸에 좋지 않다고 말하는 가공식품들, 정크푸드 같은 것들만 우리 몸에 질병을 일으키고 노화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저도 그랬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건강에 좋다고 하는 음식들은 괜찮은 줄 알았습니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소위 슈퍼 푸드 같은 것들은 정말 몸에 좋은 줄 알았습니다. 아니 사실 정말 건강에 좋은 음식이기는 합니다. 이 말에는 조건이 붙는데 ‘비교적’ 이라는 말을 붙여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그런 음식들로만 챙겨 먹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나는 늙어가고, 병이 들기도 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물론 잘 관리할 수록 더 천천히 늙고, 활력이 넘치고, 병들 가능성이 적어지기는 합니다.
하여튼 어찌 보면 우리 인생이 참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음식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데, 그 음식을 먹은 결과로 우리 몸은 늙어가고 병이 든다고 하니, 어쩌면 좋을까요? 그게 싫어서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즉 음식을 먹으면 서서히 늙고 병들어 죽어가고 먹지 않으면 바로 죽는 그런 아이러니한 상황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이것은 죄로 인해 죽어가는 우리의 삶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죄로 인한 심판의 결과로 이미 죽음을 받게 된 것이 자연스레 이해되지 않습니까? 이미 우리는 죄에 대한 심판의 결과로 날마다 조금씩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절대 피할 수 없는 방법으로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 선포하신 “나는 생명의 떡이라” 고 선포하신 말씀은 이렇게 죽어가는, 그리고 죽어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참된 생명을 주신다는 선포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것을 떠올립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생명의 양식이라고 했을 때, 그들은 제일 먼저 모세가 이끌던 시절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던 ‘만나’를 떠올렸습니다. 지금처럼 양식이 풍부하지 않고 굶주림이 만연한, 그리고 가난이 일상화 된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만나’는 정말 하늘에서 내리는 양식이자 생명의 양식이었습니다. 내가 일하지 않아도 음식이 날마다 생긴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게다가 그 “만나”를 통해서는 빈부의 격차가 생기기도 어렵습니다. 안식일을 제외하고는 하루밖에 저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자가 생길 수도 없고 가난한 자가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만나’는 하늘에서 내리는 생명의 양식 그 자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만나’도 참된 생명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라고 49절에서 선포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웠겠지만 명백한 사실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생명의 양식인 ‘만나’를 먹었던 사람들도 질병과 노화를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 생각에 ‘만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음식이니 먹어서 우리 몸의 질병과 노화의 원인이 되면 안될 것 같기는 한데, 예수님께서 아니라고 선언하시지 않습니까? 사실 갈렙과 여호수아가 만나를 40년 가까이 먹고도 늙었던 것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렇겠다고 이해가 잘 됩니다. 문제는 음식이 아니라 죄로 인해 하나님과 연합하지 못하게 된 우리들에게 있는 것인데, 우리는 자꾸만 원인을 나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참 생명이신 예수님께로 가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 우리를 바꾸려고 가야 하는 것인데, 우리는 자꾸만 내게는 아무 문제가 없으나 더 좋은 것을 받기 위해 예수님께로 간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몸의 건강에 대해서도, 나 자신의 잘못된 생활습관, 사고방식, 행동패턴, 인간관계 등에 집중하기 보다는 건강에 좋다는 음식들을 찾아 먹고, 여러 보조식품도 챙겨 먹는데 더 열심을 쏟습니다. 요새는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다고요? 네 좋습니다. 사실 요새는 그렇게 건강관리 잘 하시는 분들도 많지요. 식생활도, 운동도, 인간관계도 참 잘 관리하시는 분들이 정말 많습니다. 관련 도서나, 영상자료들도 많고, 도움 받을 수 있는 전문가들도 도처에 있습니다.
자 이렇게 열심히 관리한 분들과 그렇지 않은 분들은 얼마나 차이가 날까요? 5년? 10년? 20년? 아마 그 정도 차이가 날 수도 있겠지요. 질병에 걸릴 위험성의 차이도 있겠고, 어느 정도 기대수명의 차이도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는 단순히 장수를 말하면서 100세 시대니, 기대수명이 120세니 했었는데, 이제는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건강기대수명이 중요하다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확실히 노년기 우리 삶의 질이 달라지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 기간이 얼마나 될까요? 아까 말했던 5년? 10년? 20년? 사람에 따라 그 정도 차이가 날 수도 있을 겁니다. 그 차이가 더 커질 수도 있을까요? 제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 차이가 30년 40년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건강한 10년, 20년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과 돈을 투자하고 있습니까? 건강한 음식을 사기 위해 더 많은 돈을 지불하고, 힘들어도 운동하는데 시간을 내고, 먹고 싶은 것도 참고, 정말 많은 노력을 하지 않나요? 물론 우리 눈에 보이는 효과가 있고, 몸으로 체험하는 효과가 있어 그렇겠지요.
반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는 그 일에, 우리는 어느 정도의 노력과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있습니까? 우리 몸의 건강을 위해 하는 노력의 반 정도는 하고 있습니까? 교회 나와서 예배 드리고 헌금하는 것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방식을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기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것을 나도 함께 기뻐할 수 있도록 내 인생의 목표와 즐거움을 바꾸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투자하고 있냐는 말입니다.
제가 투자라고 했습니까? 네, 투자 맞습니다. 나중에 내 자신의 생명으로 돌려 받게 될 투자이고, 40절에서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약속하신 부활로 돌려 받게 될,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투자입니다. 실패하면, 아니 하지 않으면 망하게 되는, 죽게 되는 가장 중요한 투자 입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내게 오라,” “나를 믿으라” 지금도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생명”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