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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기다림이 기쁨이 될 때 (눅 2:36-38)_지어져가는교회 정성열 목사

기다림이 기쁨이 될 때 (눅 2:36-38)

지어져가는교회 정성열 목사

여러분은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려 본 적이 있으십니까? 남자분들이라면 이 ‘간절한 기다림’에 대해 한 번쯤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경험이 있습니다. 바로 군대입니다. 남자는 입대를 하게 되면 처음부터 한 날을 간절히 기다리게 됩니다. 바로 전역의 날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전역날을 기다리는 군인처럼,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려 본 적이 있으십니까? 임신 후에 아기를 품고, 어떻게 생겼을지, 누구를 닮았을지 상상하며 했던 기다림, 지금의 배우자와 교제하던 시절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며 느꼈던 설렘, 대학교 합격 발표를 앞두고 마음 졸이던 그 순간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기다림’이라는 주제로 참 많은 날들을 보내 왔습니다.

그런데 요즘 시대는 이런 ‘기다림’이 환영받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우리 민족은 원래부터 ‘빨리빨리’를 좋아했지만, 요즘 시대는 빨라도 너무 빨라진 것 같습니다. 무엇이든 필요한 것이 있다면 클릭 몇 번이면 해결됩니다. 그래서인지 기다림이라는 태도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시간 낭비로 여겨지곤 합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하르트무트 로자(Hartmut Rosa)에 따르면, 이러한 현상은 사회 구조 자체가 재편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산업혁명 이후 기술, 통신, 교통의 발전은 인간 사회 구조 자체를 가속화시켰습니다. 따라서 기다리지 못하는 인간의 습성은 더 이상 개인의 심리적 문제를 넘어, 사회 시스템 자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기다림은 현대인에게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인 것으로 인식됩니다.

하지만 기다림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다림이란 나와 그 목표 사이에 놓여 있는 사막과도 같은 것이다.” 기다림의 시간은 나를 갈증 나게 하고,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막은 반드시 지나가야 할 과정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기다림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오랫동안 한 가지를 기다렸던 한 여인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안나입니다. 그녀의 기다림은 대단히 긴 세월이었습니다. 당시 나이가 84세였으니, 어쩌면 그녀의 기다림은 한평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지만 안나가 살아냈던 시대를 살펴보면, 이렇게까지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절망’일 것입니다.

무엇에 대한 절망이었을까요? 첫째는 정치적인 절망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헤롯 왕은 로마가 임명한 꼭두각시 왕이었고, 로마에 충성하기 위해 무거운 세금과 강제 노동을 백성들에게 부과했습니다. 황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한 사람의 욕망이 공동체 전체의 고통으로 이어지는 사회였습니다.

둘째는 경제적인 절망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유대인들이 부담해야 했던 세금은 수입의 30~40%에 달했습니다. 여기에 세금을 징수하던 세리들이 자의적으로 더 많은 금액을 거두어 가기도 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50%를 훨씬 넘는 세금을 내야 하는 일이 일상이었을 것입니다.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조세, 헤롯에게 내는 세금, 성전세, 십일조와 각종 종교적 헌물까지 더해지니, 열심히 일할수록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셋째는 사회적인 절망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다양한 세력 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먼저 사두개인이라는 제사장 그룹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전과 관련된 종교적 권한을 독점하며, 자신들만의 이익을 챙기는 종교적 카르텔을 형성했습니다.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종교를 사회 지배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백성들에게 율법을 강요하며 종교적 폭군처럼 군림했습니다. 스스로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 수많은 규례와 형식을 만들어 사람들을 짓눌렀지만, 정작 자신들조차 그것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세 번째로는 열심당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로마의 지배에 강하게 반발하며 정치적 독립을 위해 무력 투쟁을 벌였습니다. 게릴라전을 펼치고 폭력을 사용했기에, 이들이 등장하는 곳마다 피비린내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세력들로 인해 사회 전체는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각자가 자신의 욕망을 관철하기 위해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 과연 누가, 어떤 소망을 품을 수 있었겠습니까?

넷째는 영적인 절망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 시대부터 이 땅을 회복하실 메시아를 기다려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랫동안 침묵하셨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400년 동안 선지자의 음성이 끊어졌습니다. 결국 그들은 이런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은 아닐까?”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안나는 무엇을 했습니까? 그녀는 여전히 기다렸습니다. 이 땅을 구원하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과연 안나는 그 기다림에 어울리는 사람이었을까요? 성경은 그녀를 소개하며 ‘과부’라고 말합니다. 그녀의 결혼 생활은 고작 7년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여성의 평균 결혼 연령이 약 14세였음을 감안하면, 안나는 스무 살 무렵에 남편과 사별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적어도 60년 이상을 홀로 살아온 것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과부가 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계층으로 떨어졌다는 의미였습니다. 남성 보호자가 사라진 여성은 법적 지위를 보장받지 못했습니다. 토지 매매, 소송, 채무 문제 등 그 어떤 일도 스스로 처리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이를 대리해 줄 남성이 필요했지만, 현실은 있는 것마저 빼앗기고, 없는 데서도 요구를 받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경제적으로 극심한 궁핍 속에 놓였고, 친족의 보호를 받지 못한 과부들은 대부분 극빈층으로 전락했습니다. 거리로 내몰리기도 했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신체적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었습니다. 보호해 줄 장치가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함부로 대했겠습니까? 법적 권리조차 없었기에, 끊임없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안나는 바로 그런 삶을 한평생 살아냈습니다. 정치적·사회적·종교적·영적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삶을 60년 넘게 견뎌온 것입니다. 저는 단언컨대, 안나의 삶이 이 땅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보다 더 나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중 누구도 그녀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에 있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그런 안나가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 안나를 소개하며, 그녀가 아셀 지파 출신이라고 굳이 밝힙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인물의 지파를 언급하는 경우가 매우 드뭅니다. 신약 시대에는 모두가 영적으로 하나의 이스라엘에 속해 있었기에, 구약 시대의 지파 개념을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바울, 바나바 정도를 제외하면 지파가 언급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일반인 중에서는 유일하게 안나의 지파가 기록됩니다. 바로 아셀 지파입니다.

왜일까요? 창세기 30장을 보면 ‘아셀’이라는 이름의 뜻은 ‘행복’, ‘기쁨’입니다. 또한 야곱이 아셀을 축복한 창세기 49장 20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 이 말씀을 바탕으로 아셀 지파는 행복과 기쁨, 풍성함을 상징하는 지파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아셀 지파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이름의 뜻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납니다. 성경 역사 속에서 아셀 지파는 단 한 번도 두드러진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지파들이 중요한 인물들을 등장시킬 때에도, 아셀 지파는 늘 조용했습니다. 말 그대로 ‘있으나 마나 한’ 지파처럼 보입니다.

행복과 기쁨, 풍성함을 뜻하는 이름과는 달리, 실제 역사 속에서는 기뻐할 일도, 풍성함도 찾아보기 어려운 지파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아셀 지파 출신으로 안나가 등장합니다. 그녀의 배경을 보아도, 살아온 인생의 흔적을 보아도 기뻐할 이유는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행복할 수 없는 삶이었고, 풍성함과는 거리가 먼 인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기다렸습니다. 절망의 지파, 절망의 인생을 살았을 법한 이 여인이 여전히 구원자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날, 그 기다림은 결실을 맺습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금식하며 기도하며 예배의 자리에 머물고 있을 때, 한 아기가 성전에 들어옵니다. 갓 태어나 강보에 싸인 아기를 보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하십니다. 바로 그 아기가 자신이 평생 기다려 온 메시아,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안나는 감격에 겨워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람들에게 이 아기에 대해, 메시아에 대해 말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안나의 기다림은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결코 기뻐할 수 없는 현실의 연속이었습니다.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영적 절망 속에서 과부로서 60여 년을 견뎌야 했던 삶은, 누가 보아도 무의미한 기다림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비슷한 절망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당장의 생존 문제, 삶의 목표가 무너지는 경험, 나아질 것 없어 보이는 형편 앞에서 우리는 깊은 상실감을 느낍니다. 사회는 혼란스럽고, 교회 공동체는 여전히 불안정하며, 경제적 현실은 점점 더 어려워질 때, 주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일이 버겁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조바심을 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는 일이 불안하게 느껴집니다. 그 결과, 다시 우리의 생각이 앞서고,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우며,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 보려고 분주히 움직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메시아로 오셨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대강절은 우리의 기다림을 점검하게 합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기다림 속에는 개인적인 고난과 시련을 넘어, 안나가 마주했던 그 모든 절망의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반드시 해결하실 것이라는 소망이 담겨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의 기다림에는 인내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내의 중심에는 분명한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 기다림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나의 기다림은 불안이 아니라 확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메시아를 보내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렸던 순간들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구체적인 상황은 흐릿해졌을지라도, 그때의 감정은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 기다림은 여러분에게 기쁨과 감사로 남아 있습니까, 아니면 슬픔과 불안으로 남아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반드시 웃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안나가 아기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송했던 것은, 하루하루 이어졌던 믿음의 기다림이 맺은 열매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러한 기다림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안나의 기다림이 기쁨이 되었던 것처럼,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2025년 성탄절이,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심을 고백하며 주님을 기다리는 저와 여러분에게 기쁨의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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