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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한복음 1장 1-18절/나무십자가한인교회 정병완 목사

요한복음 1장 1-18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나무십자가한인교회 정병완 목사

네 개의 복음서, 한 분 예수님 왜 복음서는 네 개나 기록되었을까요? 한 권이면 충분할 것 같지 않나요?

가족 여행을 다녀와서 어떤 게 제일 좋았냐고 물어보면 공통된 것도 있지만, 서로 다른 부분이 좋았다고 말합니다. 내가 직접 경험한 것에 다른 사람을 통한 간접 경험이 한데 어우러지면 여행이 더 풍성한 기억과 추억으로 남게 됩니다.

사람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등학교 친구가 보는 나, 대학교 동기가 보는 나, 직장 동료가 바라보는나, 가족이 바라보는 나는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조각들이 합쳐질 때, “아,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더 온전하게 알게 되지요.

복음서가 네 개인 이유가 바로 이와 비슷합니다. 마태·마가·누가·요한은 한 분 예수님을 만났지만, 각자의 눈으로, 각자의 언어로, 각자의 강조점을 가지고 예수님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네 복음서를 함께 읽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더 선명하게 만나게 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요한복음의 서문에 해당하는 요한복음 1장 1-18절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교훈을 찾고, 은혜를 나누길 원합니다.

1. 요한복음의 목적: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다른 복음서와 다른 점은 예수님의 족보나 탄생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곧바로 태초부터 하나님과 예수님이 함께 계셨다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는 메시지를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강조합니다. 정말 그런가 확인해 볼까요?

요한복음 1장 12절에는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진다고 강조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그리고 요한복음의 결론에 해당하는 요한복음 20장 31절에는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한 이유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2. 요한이 믿음을 강조한 시대적 배경을 소개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의 시작부터 끝까지 “믿음”을 강조합니다.

사도 요한이 유독 믿음을 강조한 것은 시대적 배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A.D. 70년 로마의 디도(Titus)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예루살렘 성전은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무너졌습니다. 이전에 유대인 출신 성도들은 성전을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장소로, 신앙의 시작과 끝으로 알았는데 성전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성전을 무너뜨린 로마 정부의 박해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 가운데 믿음을 버리거나 떠나는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무너져 버린 성전을 바라보지 말고, 하늘에서 이 땅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신하신예수님을 구주로 믿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라고 가르쳤습니다. 심한 박해를 피해 믿음을 버리지 말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부활의 믿음을 가지라고 격려하기 위해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3.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신 창조주 하나님 이십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이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소개하는지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 1-2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 1:1-2)

왠지 익숙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과 시작하는 단어가 같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이십니다.

2절에서 말씀을 “그”라는 인칭대명사로 바꿉니다. 그리고 본문 3절을 보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어졌고, 하나도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이 없다고 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이 선언은 말씀이신 그분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며,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선언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천지를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4. 로고스 개념으로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편 이러한 사도 요한의 가르침은 당시 예수님의 신성을 거부한 “에비온파” 이단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었습니다. 에비온파 이단은 예수님을 율법을 잘 지킨 선지자들 중 한 명 정도로 생각했는데, 사도 요한은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헬라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들이 익숙하게 쓰던 철학 용어인 ‘로고스’ 개념을 사용합니다. 헬라 철학에서 로고스는 대체로 “세상을 질서 있게 만드는 이성” 또는 “우주를 다스리는 원리”로 이해했습니다. 요한은 이런 로고스 개념을 이용해 “너희가 말하는 그 ‘로고스’는 말이지, 눈에 보이지 않는 힘과 에너지 또는 철학이론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분은 참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고, 동시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다”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시 헬라인들은 또 다른 신적 존재에 대한 학문, 철학 또는 이론인가 보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헬라인들이 말하는 지식이 아닙니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들 중 이름만 다른 또 하나의 신이 아닙니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모두 자기 이익을 위해 사람의 것을 빼앗고, 통제하고, 억압합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자녀의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을 보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달리 표현하면 믿음이란 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시는 친밀한 관계의 출발점이 믿음이라고 설명합니다.

5.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빛이십니다.

그런 다음 사도 요한은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생명을 주시는 빛으로 소개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4-5)

예수님을 빛과 생명으로 소개하는 것은 다시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를 떠오르게 합니다. 빛이 있으라는 말씀으로 시작된 창조는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이 되게 하신 분이 곧 예수님이시라는 증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죄악으로 가득한 어둠에서 벗어나 빛으로 가득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생명의 빛을 깨닫지 못합니다. 깨닫다는 의미는 붙잡다, 나의 것으로 삼는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고, 어두운 죄악에서 벗어나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을 붙잡지 않고, 자기 것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은 큰 손해입니다. 아니,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그러니 지혜로운 자가 되십시오.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두운 죄악 길에서 벗어나 빛으로 가득한 길로 걸어가길 바랍니다.

6.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그리고 본문 14절을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오늘 본문 14절은 빌립보서 2장의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한 말씀과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영광과 능력과 존귀가 동일하신 예수님께서 겸손히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신 성육신 사건과 동일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14절에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표현을 기억합시다. 여기서 “거하시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장막을 치다, 거처를 두다”의 뉘앙스를 담고 있고, 구약의 성막(장막) 하나님의 임재가 머물던 자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말이 너무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거처를 정하신’ 분입니다. 잠깐 들렀다가 가신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 우리 곁에 머물기 위해 오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그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진리”를 보았다고 선언합니다(요1:14).

7. 요한복음이 강조하는 믿음은 동사입니다

여기서 요한복음의 매우 독특한 강조가 나옵니다. 요한복음에는 “믿다”(πιστεύω)라는 표현이 매우 자주 등장하고, 전통적으로 “약 98회” 정도로 언급됩니다(집계 방식에 따라 약간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종종 지적되듯이, 요한복음은 “믿음”(πίστις)이라는 명사보다 “믿다”라는 동사를 전면에 세웁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믿음은 머릿속 동의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생각과 이론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잘 듣고,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믿음을 동사로 기록했습니다. 한 번도 명사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건 “믿음에 대한 이론과 생각”이 아니라, “믿는 사람의 삶”입니다.

8.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믿는다 말하면서, 가정에서는 믿음의 삶이 없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닮아 서로 품는 교회가 되자고 했지만, 여전히 겸손보다는 교만합니다. 서로 돌봄은 없고 무관심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의 상처와 아픔에 동참하는 긍휼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래 참아 주는 사랑의 실천이 더해져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 시간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습니까?” “지금도 그 믿음은 변함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믿음을 살아내고 있습니까?”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 2장에서 믿음이 있다면서도 행함이 뒤따르지 않는 성도들을 향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했던 권면을 기억하기 바랍니다(약 2:17, 22).

말씀과 기도로 믿음을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그 ‘동사로서의 믿음’을 살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다만 꾸준히 못할 뿐입니다. 그리고 꾸준함은 큰 결심보다 작은 습관에서 시작합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믿음을 고백하십시오. 거기에 우리가 지난 한 달 동안 묵상했던 예수님의 겸손, 서로 돌봄, 긍휼 그리고 오래 참는 사랑을 실천해 봅시다. 그래서 믿음을 명사가 아닌 동사가 되게 하십시오.

오늘 한 가지씩 결단합시다.

“주님, 저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겠습니다.”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한 주간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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