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자를 받으시는 하나님(왕하 5:1-27)
참빛교회 임건택 목사
I.
십여 년 전쯤에 한국에서 아주 재미있는 제목의 영화가 한 편 나온 적이 있습니다. “놈, 놈, 놈”이라는 제목이었는데, 무슨 영화 제목이 그런가 하고 신문에 난 영화 평을 읽어보고, 또 나중에 영화를 직접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놈, 놈, 놈.”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원래 제목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인데 이것을 줄여서 “놈, 놈, 놈”이라고 한 것입니다. 사실 이 영화는 1960년대 중반에 클린트 이스트우드, 리 반 클리프 등이 주연으로 나왔던 “황야의 무법자”(원제목은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라는 제목의 서부영화를 패러디하여 만든 영화였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웬 영화 이야기를 이렇게 늘어놓나 하고 궁금하신 분들, 혹은 거부감을 느끼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본문을 읽고 묵상하며 준비하는 가운데 이 영화 제목이 제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상한 행실을 보인 사람, 못된 행실을 보인 사람, 그리고 착한 행실을 보인 사람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여러분들과 함께 이 세 사람들, 이상한 행동을 한 사람과 못된 행동을 한 사람, 그리고 착한 행실을 보인 사람들을 하나씩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II.
1. 이상한 사람 – 엘리사
첫 번째 살펴볼, 이상한 행동을 보인 인물은 엘리사입니다. 자기 집 어린 계집종에게서 이스라엘에 위대한 선지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나아만은 왕에게 나아가 허락을 받고 선물을 바리바리 싸서 싣고 먼저 이스라엘 왕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병을 고쳐줄 것을 당부하는 아람 왕의 편지를 이스라엘 왕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왕은 그것이 이스라엘을 침략하기 위한 빌미를 잡으려는 정치적 술책인줄로 알고 자기 옷을 찢으며 비통해합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엘리사는 이스라엘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을 자기에게 보내라고 하였고, 엘리사의 요청대로 나아만이 자기 군대와 선물을 가지고 엘리야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엘리사가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자기가 요청한 대로 나아만이 자기 집에 도착했으면, 일반 상식대로라면, 최소한 나와서 맞으며 인사라도 나누어야 했을 것입니다. 나아만이 누구입니까? 비록 문둥병에 걸리기는 했지만, 나아만은 그 당시 최강대국인 아람의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비록 적대 국가이기는 했지만, 이스라엘 왕 조차도 무시할 수 없는 국빈에 가까운 손님이었습니다. 그러한 엄청난 신분의 손님이 자신을 찾아왔는데, 버선발로 뛰어나가 맞이하지는 못할망정 내다보지도 않습니다.
9절과 10절을 보십시오.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어 이르되….” 직접 내다보기는커녕 사람을 내보내 말을 전하였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행동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엘리사가 사람을 내 보내어 전한 말입니다. 뭐라고 말합니까? 10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엘리사의 이러한 행동과 말이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이상한 것이었는지는, 이에 대해 11절과 12절에서 나아만 장군이 노기충천하여 한 말을 보면 드러납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11-12절)
나아만이 기대했던 것이 무엇이었다는 말입니까? 아마도 자기 나라의 선지자들처럼 자기 앞에 굽실 거리며 나와서 신비한 약을 발라 준다거나 무슨 마법의 주문 같은 것이라도 외워가면서 치료해 주리라고 기대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얼굴도 한 번 보여주지 않은 채로 요단강에 가서 목욕이나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일곱 번씩이나 말입니다. 그러면 나을 것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엘리사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러분들이 고대 이스라엘 시대의 요단강이 어떠했는지를 아신다면 왜 나아만 장군이 이렇게 기가 막혀하며 분노했는지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그 시절의 요단강은 오늘 날 여러분들이 성지 순례를 통해서 보시는 요단강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헐몬산 자락에서 시작되는 요단강은 넓이가 30미터 안팎으로 길이 250킬로미터 이상을 흐르는 강이지만 워낙 높은 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물살이 빠르고, 중동 지역의 ‘와디’라고 부르는 강이 대부분 그렇듯이 흙탕물이 흘렀습니다. 그나마 우기에는 물 양이라도 많지만 그 외의 계절에는 물의 양도 적고 흙탕물이 흐르는 강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레바논 산의 눈이 녹아 흘러내려 강이 된 다메섹의 아바나 강과 바르발 강은 물이 차고 깨끗하기로 유명했습니다. 따라서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서 목욕을 하라는 엘리사의 말에 기막혀 한 것은 당연한 반응인 것입니다.
하지만 나아만이 진노하였던 것은 엘리사가 가서 씻으라고 한 강이 요단강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진노한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자신이 방문하였는데도 버선발로 나와서 맞지 아니한 엘리사의 무례함과 요단강에서 한 번도 아니고 일곱 번이나 목욕을 하라고 한 이상한 행동과 요구 때문이었습니다. 이 이상한 행동과 요구가 나아만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엘리사는 왜 이렇게 얼토당토않은 이상한 행동을 하였을까요? 두어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나아만이 적대국가의 장군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아람이라는 나라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이스라엘을 가장 많이 괴롭혔던 나라였습니다. 게다가 오늘 본문 2절에 나타난 바처럼 나아만 자신이 그 선봉에 서서 이스라엘을 약탈하고 포로를 잡아간 장본인 이었으며, 6장 후반부에 기록된 것처럼 아람 사람들이 또 다시 쳐들어와 사마리아를 포위하여 사마리아 성 중에 있던 사람들이 인육을 먹어야 할 정도로 곤경에 처하게 하였는데, 이 일의 중심에도 나아만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엘리사가 나아만의 병을 고쳐주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았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달갑지 않은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나아만의 콧대를 꺾기 위해서 요단강에 내려가 목욕하라고 했다고 생각한다면, 그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추측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유는, 엘리사가 무엇인가 깊은 의도를 가지고 나아만 장군에게 그렇게 대하였으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어떤 이유 때문에 엘리사가 나아만의 얼굴도 보지 않고 사람을 시켜 요단강에 내려가 목욕하라고 말을 전하였을까요? 오늘 본문 8절 마지막 부분을 보면 엘리사가 왜 그렇게 이상하게 행동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아람이나 다른 나라들의 선지자와 같지 않음을 보여주려 한 것입니다. 앞서 11절에서 나아만이 한 말에서 드러난 것처럼, 아람 나라나 이웃의 다른 나라의 선지자들은 돈을 받고 마술을 부리거나 축복을 해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물을, 혹은 복채를 받는 만큼 복을 빌어주기 때문에, 나아만 장군이 그 엄청난 선물을 가지고 엘리사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는 복채에 따라서 예언이나 복을 빌어주는 그런 종류의 선지자가 아니며, 또한 여호와 하나님도 다른 이웃 나라들의 신들과는 다른 하나님이심을 보이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즉, 엘리사는 자신이 약을 바르거나 기도를 하거나 하지 않음으로써, 그리고 요단강에 내려가 일곱 번 목욕을 하라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전함으로써, 나아만의 병을 고치신 것이 선지자 엘리사 자신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알려 주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이 혼동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만일 나아만을 치료하기 위해 엘리사가 그 어떤 행동이라도 취하였다면, 나아만은 엘리사가 자신을 치료한 것으로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엘리사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나아만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떤 신이신지를 분명히 알려주기 원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구원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 알려주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엘리사는 나아만이 찾아왔을 때, 심지어 얼굴도 보이지 아니하고 요단강 물에 내려가 일곱 번이나 씻으라는 어처구니없는 주문을 한 것이며, 또한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아만에게서 단 한 푼의 돈도 선물도 받지 않고 돌려보냈던 것입니다.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축복과 구원의 은혜는 공짜, 즉 값없이 주시는 은혜임을 선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엘리사의 이 이상한 행동을 통해 구약의 구원의 은혜와 신약의 구원의 은혜는 동일한 은혜, 값없이 주시는 은혜라는 사실을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 곧 율법을 지키느냐 아니냐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엘리사는 자신의 이상한 행동을 통하여 나아만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선포하였고, 나아만은 여호와 하나님을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2. 나쁜 사람 – 게하시
그런데 이러한 엘리사와 하나님의 계획을 망가뜨릴 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게하시입니다. 20절 이하에 나오는 게하시는 선지자 엘리사의 사환, 즉 엘리사를 수종드는 자였습니다. 사환, 수종드는 자라고 하니까 그저 심부름꾼 정도로 생각하기 쉬운데, 구약 성경에서 수종든다는 표현은 그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게하시는 엘리야를 가장 근거리에서 모시면서 선지자 수업을 하는 수제자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사무엘이 엘리 제사장을 수종하는 사환이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수제자와 같은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게하시가, 이상한 행동을 통하여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려는, 자기의 선생님 엘리사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게하시는 자신의 선생이며 주인인 엘리사가 나아만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않고 그냥 돌려보내는 것을 보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나아만과 그의 병사들이 가지고 왔던 선물들을 모두 가지고 떠나자, 곧 그들을 뒤쫓아 갔습니다. 그리고 선지생도 두 사람을 돕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핑계를 대고 은 두 달란트와 옷 두벌을 받아왔습니다. 은 두 달란트면 68킬로그램 정도입니다. 그리고 요즘으로 치자면 수 만 불에 달하는 그 엄청난 명품 브랜드 옷을 두 벌이나 받아왔던 것입니다.
비록 게하시가 그 받아온 재물을 자신의 집 앞에 감추기는 하였으나, 게하시의 동기가 그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20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가 가지고 온 것을 그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 하고.”
자기의 주인 엘리사가 아무것도 취하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였다는 것을 보아도, 또한 무엇이라도 빼앗아와야겠다는 말을 보아도, 단순히 사적인 욕심만이 동기는 아니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그쳐 묻는 엘리사에게 거짓말은 하였지만, 그 동기는 자기 욕심만은 아니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주인인 엘리사를 위한 충성심에서 나온 욕심이었을 수도 있고, 민족적인 열심이었을 수도 있고, 나아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한 의욕이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주인을 위한, 민족을 위한, 혹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행하였을지도 모르는 게하시의 잘못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통하여 문둥병을 벌로 내리십니다. 너무 심한 벌이 아닙니까? 게하시가 민족적인 열망과 자기가 섬기는 엘리야를 위해, 더 나아가 신앙적인 열정을 가지고 행한, 어쩌면 선한 의도였을지도 모르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심한 벌을 내리신 것입니까? 왜냐하면 그의 열정과 욕심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열심이고 열정이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게하시의 잘못은 엘리사에게 거짓을 말하고 나아만에게서 물건을 취한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물건을 취한 것이 잘못한 것이기는 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엘리사의 의도,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열심을 가지고 나아만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잘못 전달되게 하였다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의 생각과 열심으로 행하는 신앙과 헌신은 하나님 나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위태롭게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3. 좋은 사람 – 작은 계집아이
마지막으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눈여겨 볼 필요조차 없는 한 인물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대체로 6명 정도의 인물이 등장했는데,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 엘리사와 나아만, 게하시, 그리고 이제 살펴볼 나아만의 작은 계집 종입니다. 다른 모든 등장인물들에 비교할 때, 이 어린 여종은 너무 보잘 것 없는 인물입니다. 이 아이는 2절에 기록된 것처럼, 나아만이 이스라엘을 침략했을 때 전리품으로 잡아온 아이였습니다. 아마도 부모는 아람 군대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혼자만 남게 된 고아였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계집아이였습니다. 천한 종이었습니다. 고대 근동 문화에서 어린 여종은 그 어떤 권리도 없으며, 그 누구도 눈 여겨 보지 않는, 아무것도 바라 볼 수 없는 절망 속에 살아 갈 수 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로 이 천한 계집종을 택하신 것입니다. 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 천하고 연약한 여자 아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계획을 이루셨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 인간이 보기에 무익하고 보잘 것 없고 심지어는 불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존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 고아, 과부와 같이 이스라엘의 사회에서 힘이 없고 연약하여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자들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이런 연약하고 무익하고 세상 사람들은 불필요한 것처럼 여기는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십니다.
종들의 간청에 못 이겨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목욕을 한 후 몸이 깨끗케 되었을 때, 나아만이 고백한 15-17절의 말씀을 한 번 눈 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니 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 앞에서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나아만이 받으라고 강권하되 그가 거절하니라 나아만이 이르되 그러면 청하건대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이 위대한 신앙의 고백이 누구에게서 시작된 것입니까? 바로 이 작은 계집종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큰 구원의 역사가 연약하고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어린 여자 아이에게서 시작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나아만을 낫게 한 것은 엘리야를 통해서입니다. 하지만 그 시작은 바로 이 작은 계집종이었습니다. 아무리 문둥병으로 인해 절박한 처지에 있던 나아만 부부였지만, 어린 계집종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정도라면, 이 여자 아이가 평소에 나아만 부부에게 얼마나 신임을 얻었는지 그 행실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4절을 보면 나아만이 심지어 아람 왕에게까지 나아가서 이 어린 계집종에 대하여 말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이 계집종의 처지는, 절망과 좌절 가운데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원망하며 살아갈 만한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이 어린 아이는 자신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신실 하였습니다. 이 어린 아이는 자신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선지자에 대하여 말할 기회를 보고 있다가 틈이 나자 즉시 자기의 주인에게 자신이 믿는 하나님과 그의 선지자에 대해 말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어린 아이는 자신을 종으로 끌고 온 나아만 장군 부부를 원망하고 저주했을 만도 한데, 그러기 보다는 그들을 사랑하고 위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이 어린 소녀의 나아만을 위한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이 신실한 믿음이, 원수라고도 할 수 있는 나아만까지도 긍휼히 여긴 이 아이의 사랑의 마음이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나아만이라는 이방의 위대한 장군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섬기게 된 것, 그것은 바로 그 누구도 눈 여겨 보지 않는 작고 천한 계집종의 믿음의 삶, 믿음의 증거에서 시작 되었습니다.
이 작은 계집종이 그 누구도 도움을 주지 않는 절망적인 삶의 상황 속에서조차 믿음 잃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이 작은 어린 여자 아이의 헌신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큰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III.
성도 여러분들, 여러분들은 참된 신앙의 삶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진실한 신앙의 삶”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뭔가 큰일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찾으시는 신앙의 삶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신앙의 삶, 성도의 삶은 이 작고 천한 계집종과 같이 자신이 처한 삶의 상황에서, 비록 그것이 때로는 절망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자세를 가지고 맡겨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인 것입니다. 신앙은 삶입니다.
흔히 이민의 삶을 살아가시는 많은 분들이 자신의 꿈과는 거리가 먼 이민의 삶 속에서 좌절과 절망감 속에 살아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와서 이런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나 하는 생각이 드십니까? 나아만의 작은 계집 종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민 생활을 하며 자녀를 키우시는 아내들, 어머니들, “나도 한때는 꿈 많고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이 되고 싶었는데, 아이들 뒷바라지나 하며 집안 살림이나 하는 여자가 되었나?”하고 자신의 처지에 한탄하고 계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이 어린 계집종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위대한 사람들, 능력 있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미련하고 어리석고 연약한 것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이렇게 선포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하나님께서는 천하고 멸시받는 나아만의 계집종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볼 때에는 보잘 것 없고 미련하고, 연약한 여러분들을, 그리고 저를 택하셨습니다. 요단강에 내려가 일곱 번 목욕하라는 미련한,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을 통하여 나아만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이 세상에 오셔서 죽임을 당하시는 미련한 방법,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을 통하여 여러분들과 저를 구원하시는 큰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이 계집종이 자신의 절망적인 삶의 상황 속에서도 신실한 믿음을 잃지 않고 사랑을 가지고 거룩한 하나님 백성의 삶, 신앙의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영광 받으시고 이 아이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신앙의 삶을 여러분들과 저에게도 허락하셔서, 매일 매일 처하는 우리의 삶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 백성의 삶의 자세를 가지고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큰일들을 이루어 나가시는 놀라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