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해야 채워진다(누가복음5:4~11)
밴쿠버 복음자리교회 조대호 목사
찰스 스펄전의 우울증
어느날 한 화가가 찰스 스펄전 목사님의 초상화를 그리려고 시도했는데, 갑자기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하는겁니다. 이유를 묻자 “목사님의 얼굴이 매일 바뀌고 있어서 단 한번도 같은 모습인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스펄전은 정신 건강에 관한 책을 30권 이상을 갖고 있었는데 특히 우울증에 관해 읽고, 쓰고, 또 우울증을 앓기도 했습니다. 그는 편지에서 그의 영혼이 ‘쇠약해지고 있다’고 자주 언급했습니다. 종종 자신을 “죄수”로 부르고 이유 없이 울었습니다. 그래서 스펄전의 전기를 썼던 작가들 중에는 그가 ‘’조울증”을 앓고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펄전의 ‘우울증’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논문을 썼던 닥터 브라이언 알버트는, 스펄전의 주치의들의 의견을 종합해서 “스펄전의 우울증은 걱정이나 일의 과도한 중압감”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스펄전은 이런 자신의 상태에 대해 “우울증은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질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것은 회개의 영역은 아니지만, 소화불량이나 우울하게 하는 다른 악의 작용”이라고 추측했습니다. 스펄전의 글에서는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던 여러 이유들이 있었다. ‘질병, 트라우마, 외로움, 과도한 정신노동, 명성, 실패, 죄, 긴장, 논쟁, 비판’ 등등 다양한 이유들로 스펄전을 우울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시몬(베드로)을 밤새 잠못 이루게 한 ‘부족함’
흔히 ‘베드로’로 알고 있는 ‘시몬’은 우리들처럼 일상을 열심히 살아온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결혼해서 가정을 가진 가장이며 동시에 어선을 가진 선장이었죠. 심지어 자기가 목표로 세운 일에 대해서는 늘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고기가 잡힐 때까지 밤새도록 묵묵히 애를 씁니다. 시몬과 함께 배를 탔던 사람들에게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기 때문에 가족을 생각하며 포기하지 않고 그물질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기가 마침 그날따라 잡히지 않습니다.
일상이 되어버린 스트레스
고기가 잡히지 않았다는 것이 그날만 일어난 특별한 사건이었을까요?. 낚시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 있습니다, “고기가 잡힐 때도 있고 허탕을 칠 때도 있다”는 것을. 시몬에겐 사회생활 하다 보면 흔히 겪는 수많은 불편함 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만큼 시몬을 우울하게 만드는 일상적인 스트레스의 원인들이 다양했는데 자신이 하는 일에서 오는 ‘부족함’이 대표적입니다.
스펄전은 자신을 우울하게 만들었던 다양한 이유들이 있었지만, 오히려 그것들은 ‘목회에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 때문에 아픈 자들에 대해 공감할 수 있었고 거기서 위대한 설교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베드로가 설교를 하자 3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세례를 받고 회심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 시몬이 겪는 부족함과 이 순간에 만난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가 위대한 복음 증거자로 현장에서 쓰임 받는데 터닝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시몬이 느낀 두 가지 부족함
시몬이 느꼈던 부족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의지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도구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몬을 따라다니던 ‘부족함’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내려놓을 줄 아는 포기의 부족함
5절에서 시몬은 예수님께 “선생님, 저희가 어제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고 하소연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시몬은 언제 포기해야 하는지 그 시점을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그의 목표는 ‘이 시간까지 수고했는데 빈손으로 가면 않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꾸 미련이 남아 ‘그만 돌아가자’ 말할 결단이 서질 않았던 겁니다.
포기할 것은 ‘꿈’이 아니라 ‘나’이다.
시몬의 꿈이 뭘까요? ‘만선’입니다. 우리의 꿈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내가 하는 일과 가정과 교회에서 ‘만선’을 이루길 기대하며 애를 씁니다. 그런데 그것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다보니 미련이 자꾸 남습니다. 마치 도박하는 사람들이 도박을 쉽게 끊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죠. 제가 복무했던 바로 옆 부대인 특전사에서 모토가 되는 구호가 있습니다 “않되면 되게 하라.” 우리는 남/녀 모두에게 “될때까지 이 악물고 버티라”고 사회로부터 강요 받아 왔습니다. 중간에 포기하면 ‘의지가 약하다’느니, ‘네가 아직 배가 부르다’느니 하는 말로 목표를 달성하도록 강요 받습니다. 시몬은 스스로에게 ‘포기’할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워주시기 위해서는, 한쪽에서 ‘포기’해야 합니다.
시몬이 느낀 또 하나의 부족함은
’인생은 아마추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인식의 부족함
시몬은 자기의 능력과 ‘촉’을 믿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배우고자 하는 모든 통로들을 막아버립니다. 적어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을 이 바닥에서 ‘프로페셔널’이라고 여기며 살아 왔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프로페셔널이 없습니다. 평생 배우며 살아야 하고 심지어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도 배워야 할 만큼 아마추어입니다.
스펄전이 런던에서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자신에게 여러모로 능력을 인정받은 ‘프로페셔널 목회자’로서의 성공과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때를 ‘충격’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성공(프로페셔널)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다 보니 지금까지 즐겁게 하던 사역이 ‘직업(일)’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삶의 즐거움은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호기심과 배움도 있다’는 것을 시몬처럼 한창때는 잘 모르고 삽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때, 누구보다 실패의 한복판에서 그분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했을 시몬은 어쩔 수 없이 가까이서 들려오는 소리만 들으면서 ‘자기 그물’만 씻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겐 시몬을 제자로 삼고자 하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계획을 ‘어떻게 이루셔서 그의 마음을 돌이키셨는지’가 궁금합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자신의 부족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3절에 보면 예수님이 군중에게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 거기 있던 배들 중에 하필 ‘개시’도 하지 못한 그의 배에 의도적으로 오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장에서는 불문율이 하나 있습니다. 첫 개시하는 손님이 중요합니다. 그냥 물어보기만 하고 가면 뒤통수에 엄청난 부담을 줍니다.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한 시몬의 배에 올라서, 그것도 시몬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으러 온 군중들을 위해 예수님은 시몬의 배를 택하여 오르십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주님은 우리의 초청이 아닌 ‘그분 스스로’ 내 인생의 배에 올라 타셨습니다. 이때부터 ‘믿음과 현실’에 대한 갈등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군중들이 잘 보이도록 ”배를 호숫가에서 약간 떼어 놓으라”하십니다. 그리고는 그 배에서 군중들을 가르치셨다. 이 때 예수님의 가르침이 시몬의 귀에 들어오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분명 대상은 군중이었지만, 예수님에겐 시몬도 그 군중의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삶과 관련 없는 얘기가 있을 수 없습니다. 말씀은 모두가 먹을 수 있는 양식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듣고 있는 사람이 바로 시몬입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의 메시지를 듣고 싶어서 왔기 때문에 그분이 어디서 외치던 그의 목소리에 주목했습니다. 그러나 가까이에서도 주목하지 못하던 시몬을 위해 예수님은 그에게 가까이 가셨습니다. 그리고 4절에서 그분의 말씀을 시몬이 가장 먼저 직접 경험하도록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이젠 포기 하십시오.
그러자 시몬이 반응합니다. (5:5)“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 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내 생각과 상식과는 다르지만, “선생님이 말씀하시니까” 다시 해보겠다고 합니다. 마음이 우울할 때에는 의도적으로 말씀을 피할 수도 있고,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시몬이 자신을 포기하도록 말씀이 시몬을 따라온 것입니다.
말씀 앞에 이제 그만 ‘포기’ 하십시오!. 주님 앞에서 포기하는 것은 순종의 또 다른 인격입니다. 멈춰야 할 때가 있는데 여전히 시몬처럼 될 때까지 밤새지 마십시오. 포기하면 감당할 수 없는 은혜로 우리의 심령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실패는 ‘반복’될수록 더이상 시도도 하지 안고 우리를 두렵게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 두려움을 무뎌지게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포기할 줄 모르는 시몬을 채워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포기할 시점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곧 그것은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반응은 즉각 나타났다 (5:6)”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우리의 부족함이 채워지기 위해서는, 완전히 부족해져야 합니다. 시몬은 (5:8)“나는 부족한 죄인입니다”라고 비로소 자신의 부족함을 선언했습니다.
“제게서 떠나 주십시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셔서 어떤 메시지를 선포하셨길래, 시몬은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렸고, 또 뜬금없이 잡힌 고기에 대해 감사를 표하기 보다는 (5:8)“제게서 떠나달라”고 그리고 “나는 죄인이라”고 시인했을까요?
그것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였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는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시몬을 만나시기 전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라고 회개를 선포하셨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듣기 싫어도 시몬이 계속 들어야 했던 것은 “우리가 왜 회개해야 하는가?”의 문제였습니다. 회개는 우리가 ‘하나님나라’를 얻기 위해 열어야 할 첫번째 문입니다.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과 설움과 아픔이 없는 ‘하나님나라’를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넉넉히 얻을 수 있는 것은, ‘나를 부족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부족해져야 채워주십니다.스펄전은 자신이 우울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말하면서도, 이런 얘길 했습니다 “누군가 정신 질환에 대해 완전히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약간 균형을 잃은 사람들이 아닐까.”
배와 가족이라는 가장 큰 재산을 가진 시몬이 부족할게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항상 부족함을 느끼며 살아 왔습니다. 가정과 재산이었던 어선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몬은 자신이 꿈에 그리던 ‘만선’을 이루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따라 갈 수 있었던 것은 내 전부라고 여겼던 인생의 배를 주님이 넘치도록 채워주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시몬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순간부터 ‘베드로’라는 달라진 이름을 섞어서 사용했습니다. 정식으로 베드로라고 불리워진 것은 한참 뒤였습니다. 복음은 나뿐만 아니라 모두를 채웁니다. 그만큼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을 뿐만 아니라 그들도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나는 부족한 목사였습니다
전에 함께 동역했었던 목사님 한 분이 한국에서의 있었던 경험을 나눠준 적이 있습니다. 본인이 부임해서 목회를 시작한 교회가 너무나 잘 세워져갔다고 합니다. 다른 교회에서 하지 않는 특별한 활동을 하면서 교회도 성장하고 목회도 즐거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단 목회자들이 모이는 회의에 참석하면 다른 목사님들과 깊은 교제를 하지 못했습니다. 목사님은 다가가는데 다른 목사님들과 깊어지지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교회에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열심히 달려온 목사님에게도 큰 낙심이 되어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교인들도 일부 떠났다고 합니다. 그런 일을 겪고 있을 때 교단 회의에 참석했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전까지 가까워지지 못했던 목사님들이 ‘찾아와서’ 위로를 해주더라는 것입니다. 목회가 잘 되어서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을 때엔 누구도 가까이 오지 못했던 목사님들이 아픔을 겪는 자리엔 먼저 와서 위로를 건냈습니다. 누구보다 그 실패와 절망의 여정을 잘 알기에 누구랄 것도 없이 위로의 손길을 내밀어줬던 것입니다. 그 때 알았다고 합니다, “내가 어려움에 처하니, 그것을 이미 겪었던 목사님들이 그 공감대 때문에 더욱 가까워졌다”는 것을.
부족함에서 오는 아픔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공감하고 중보하게 합니다. 부족함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말씀 보다는 내 능력을 의존합니다. 부족해져야 주님이 채워주십니다. 한꺼번에 포기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주안에서 조금씩 뒤로 물러서십시오. 호숫가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군중이 한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내가 미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