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 이야기 1> 화해를 향한 삶
지난 씨리즈에서 우리는 용서의 여러 가지 측면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이며 그리스도는 용서에 있어서 우리에게 큰 모범이 되십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용서를 통해 완성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단지 감정적인 호감이나 불쌍한 사람들을 향한 착한 행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불편하게 하고 나에게 손해 혹은 해를 끼친 사람을 향해서도 실천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씨리즈에서는 용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화해에 대해 살펴 보려고 합니다. 용서가 개인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인 반면, 화해는 쌍방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둘 사이의 관계가 망가지는 일은 쌍방의 문제인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거나 해를 끼친 사람을 마음으로 용서했다고 해도 상대방이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화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게다가 화해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쪽에 의해 반복적으로 상처를 입는 일이 계속될 때, 다시 말해서 가해자가 잘못된 행동을 멈출 의사가 없을 때 섣부르게 화해를 시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 아니라 더 큰 상처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피해자의 상처가 충분히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화해를 시도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화해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상처가 들추어져서 화해로 가는 길을 방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화해의 작업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상호간 신뢰를 회복하면서 사려 깊게 이루어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화해는 상처와 아픔을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치유와 신뢰 회복을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화해란 단순히 갈등을 제거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 사이에 긍정적인 상호관계를 구축하는 것을 말합니다. 양자가 과거에 긍정적인 상호관계를 가지던 사이라면 화해는 과거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될 수 있지만 소원했던 관계 후에 서로 용서하고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을 배우면 화해 이후 두 사람은 더 깊이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화해에는 개인적인 화해뿐 아니라 집단 간에 화해를 이루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개인적인 차원의 화해는 개인적인 친분 관계가 망가져서 소원한 관계가 된 사람들이 다시 원래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집단 간의 화해라고 하면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 있는 집단이 이해관계로 인한 적대적인 대치 상황을 극복하고 양자 사이에 긍정적인 관계를 만드는 과정을 말하거나 긍정적인 관계가 만들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혹은 이해관계가 없는 집단 간에도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해 있거나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상대방과의 소통 부재로 인해 단절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면 둘 사이에 단절을 가져왔던 장벽을 제거하고 긍정적인 상호소통의 관계를 만드는 것도 집단 간의 화해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화해는 단순히 용서 후에 뒤따르는 일이라고 단정할 수 없고 쌍방의 소원한 관계, 적대적 관계 혹은 단절된 관계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긍정적인 상호관계를 만든다는 점에서 화해가 좋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사회적 상황은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화해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서로 상처를 입히거나 손해를 끼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미워하고 증오심을 품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입장이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계속해서 강화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화해는 불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 사실, 화해라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뿐 아니라 집단 사이에서도 어쩌면 굳이 화해하려고 하지 않고 지금 그대로 지내는 것이 편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해를 시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소원한 관계, 단절된 관계를 그대로 방치하고 지내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는데 단절된 관계 속에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 속에 이 말씀이 살아 있다면 우리는 단절된 관계에 만족하고 지낼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삶은 자기중심적인 삶, 혹은 자기만족적인 삶이 아니라 타자를 품는 삶이며 타자를 향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집단들을 품고 있는 공동체는 결국 자기파괴적인 공동체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남아공의 흑인으로서 백인들에 의해 극심한 인종차별을 겪었던 데스몬드 투투는 “용서 없이는 미래가 없다”고 말했는데 적대적 관계에 있는 집단들을 품고 있는 공동체의 미래는 희망적일 수 없습니다.
셋째, 그리스도인들은 화해의 직분을 맡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단에 예물을 드리다가도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가서 형제와 먼저 화목한 후에 제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고 화평케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화목을 추구해야 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혹은 세상이 적대적인 관계 혹은 단절된 관계를 극복하고 긍정적인 상호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요즘처럼 사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적대시하는 세상에서 화해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마치 골리앗 앞에 선 다윗과 같은 입장이 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화해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화해의 사역을 위해 부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적으로는 (현실적으로는) 가능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매순간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박진경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객원교수, Family Alive 대표, 홈페이지: www.familyalive.ca, 이메일: familyalive202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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