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질문 3, “선하신 하나님이 왜 고통을 허락하시는가?”_요한복음 11장 17~27절
토론토우리는교회 최경진 목사
미국 워싱턴주의 한 신학교에서 교회사와 신학을 가르치던 제럴드 싯처(Gerald Sittser)라는 교수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주권을 가르치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1991년 어느 가을날, 그는 가족들과 함께 원주민 선교를 마치고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큰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마주 오던 음주운전 차량과 정면충돌하는 끔찍한 사고로 자신의 어머니와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겨우 세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딸을 동시에 잃었습니다. 가장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던 신학자에게, 인생에서 가장 처참한 비극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이후에 쓴 그의 책에서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날 밤, 나의 영혼은 거대하고 차가운 어둠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았다. 나는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다. ‘하나님, 도대체 왜입니까? 선하신 당신이 어떻게 내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여러분, 어찌보면 제럴드 싯처가 마주했던 이 처절한 절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살아가면서 뜻하지 않은 폭풍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는데도,,, 감당할 수 없는 질병을 만날 때도 있구요, 예상하지 못했던 사업의 실패를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또 자녀의 방황으로 인해 칠흑과 같은 날을 보내기도하고, 사랑하는 이와의 갑작스런 이별을 겪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어김없이 이 질문이 터져 나옵니다. “하나님이 정말 선하시다면, 왜 내게 이런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오늘 인생질문 세 번째 시간에 우리가 함께 고민해 볼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왜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오늘 이 주제로 우리 인생을 돌아보려고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고난 가운데 어떤 존재로 남아계시는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바라기는 오늘의 이 주제가 우리 인생에 풀리지 않던 한 부분을 해결하는 은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이 주제를 다루기 위해 먼저 두 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1.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은 무엇인까?
2. 그리고 고통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먼저 첫 번째 질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왜 우리는 고통을 겪을 때 하나님을 선하다고 생각하지 못할까요? 우리가 고통 앞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의심하는 이유는, 선함에 대한 우리의 정의가 하나님이 정하신 정의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선하신 하나님은 보통 어려움이 없애주시거나, 내가 원하는대로 일이 잘 풀리게 해주시는 것이 상당부분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선함은 이정도로 단순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분이 언제나 옳고 완전하게 행동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좋은 것을 주시는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분 자체가 좋은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것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로 선하신 분입니다. 그 선하신 분이 결국 나를 책임지시기 위해 신실하게 움직이신다는 것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그럼 두 번째 질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중요한 질문이지요.
“그렇다면 고통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선한 분이라면, 도대체 왜 고통을 허락하셨는가? 이것이 오늘 우리 안에 가장 궁금한 질문입니다. 오늘은 결론부터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고통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이 고통을 만드신 분으로 오해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이 어디로부터 왔는가를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고통을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 본연의 세계에는 고통이 없었습니다. 고통은,,, 인간이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결정했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선과 악을 구분하는 열매를 먹었을 때부터 인간은 고통의 짐을 지게 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선택한 결과이고, 죄로 인해 반복되는 결과가 바로 고통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제의 질문을 수정해야 합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왜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라는 질문은 본질적으로 맞지 않는 질문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이런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주제의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합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겪는 고통 속에서 무엇을 하시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 본문을 통해 찾아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잘 아는 사건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예수님이 다시 살려내시는 이야기예요. 오늘 우리가 다 읽지 않았지만, 이 사건은 요한복음 11장 1절부터 시작됩니다.
본문의 상황을 간략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나사로라는 사람이 중병에 걸려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됩니다. 자신의 오라버니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자기 집으로 오시기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즉시 나사로에게 가지 않으셨어요.
이틀이나 더 지체하시다가 나중에 나사로의 집으로 향하셨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도착하시기 전에 이미 나사로는 죽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세요. 예수님이 도착하셨을 때 이미 나사로는 죽은지 4일이 지났고, 많은 사람들이 나사로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다가 먼저 뛰어 나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원망스러운 말을 합니다. 2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21.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충분히 원망할만 합니다. 예수님이 일찍 오셨더라면 다른 결과가 일어날 수도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다의 이 불평에 대해,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세요. 그리고 예수님은 이어지는 25절과 26절로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우리 함께 25절과 26절을 읽겠습니다.
25.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26.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나사로는 이미 죽었고, 그의 가족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죽음이라는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극심한 고통 속에서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럼 바뀐 오늘의 주제를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겪는 고통 속에서 무엇을 하시는가?”
여러분,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겪는 고통 속에서 부활을 선포하십니다. 여러분, 부활이 무엇입니까? 부활은 죽음을 이겨낸 것을 말합니다. 고통의 가장 끝자락인 죽음이, 하나님 앞에서는 부활이라는 결과로 마무리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그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하나님은 부활을 이뤄내셨습니다.
우리의 고통 속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그분은 고통으로 끝나지 않을 부활을 준비하십니다. 오늘 마르다는 올아비의 죽음이라는 고통을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루실 수 있는 부활도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기억하세요. 죄로 인해 불완전한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지속적으로 고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예언의 은사는 없지만, 오늘 이거 한 가지는 예언할 수 있어요. 저나, 여러분이나, 늘 평안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가 해결되면, 또 다른 하나가 고통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세상을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부활의 예수를 믿는 우리는 그 고통과 고난 때문에 더 분명한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의학자이면서 신학자였던 폴 브랜드는 인간이 느끼는 고통에 대해 연구하면서 이런 결론을 얻었다고 합니다.
“Pain is a gift.” 고통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신호이다. 그래서 고통은 방향을 안내한다.
한국에서 사역할 때 저는 매년 청년들과 국토순례를 했습니다. 그 여정 중에 소록도라는 섬에 들어가는 날이 있습니다. 소록도는 일제 강점기 시절에 한센병 환자들을 격리시켰던 섬입니다. 아직까지도 소록도에는 한센병, 즉 성경에서 말하는 문둥병 환자들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한센병의 특징은 고통을 감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면,,,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한센병 환자들은 몸에 어느 부위가 썩어도 그곳이 어디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팔을 잘라내거나 몸 내부가 썩어져서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몸의 통증은 병든 곳을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통증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오는 일종의 신호와 같은 것입니다. 삶의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의 고통은 우리 영혼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신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고통의 신호 속에서 부활이라는 방향을 제시하시고, 부활을 통해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답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겪는 고통 속에서 무엇을 하시는가?” 그분은 온전한 회복을 이룰 수 있는 부활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문제를 다시 온전하게 회복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 그럼 오늘 주제의 두 번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본문 11장 28절부터 보시면, 같은 장면을 마리아의 입장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부활의 복음을 들은 마르다는 마리아에게 달려가 예수님이 그녀를 찾으신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마리아 역시 예수님께로 가서 깊은 슬픔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32. 마리아는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 발 아래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언니 마르다와 한 토시도 틀리지 않은 문장으로 예수님께 말했어요. 그런데 이 말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3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33. 예수께서는 마리아가 우는 것과 함께 따라온 유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마음이 비통하여 괴로워하셨다.
이것은 마르다에게 부활의 복음을 선포하실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이상하지요? 왜 예수님은 이런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동시에 철저하게 인간이셨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완전하신 신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세요. 그러나 동시에 그분은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의 고통을 공감하시기 위해 그분은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꼭 인간으로 오셔야만 했는가? 그냥 당신의 능력으로 모든 죄를 해결하시면 되는데, 왜 하나님은 그 모든 혼란을 손수 막지 않으실까?
사실 이러한 질문과 생각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대로, 세상이 잘못되어져 가고 있는 이유는, 우리 인간이 선택한 죄성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바뀌지 않는 이기심, 교만함, 잔인함, 분노, 전쟁, 폭력… 이러한 죄성이 여전히 세상을 혼란스럽고 어렵게 만들고 있잖아요. 지금도 멈추지 않고 있는 미국과 이란의 전쟁만 봐도 인간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이기적인가를 알 수 있지요.
그런 우리의 죄성과 악함에 대해 하나님이 진노의 검을 드셔서 모든 악을 처단하신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하시기로 작정하신다면, 우리 중에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여전히 내면 깊은 곳에 악함과 이기심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칼을 들지 못하시는거예요. 오히려 그분의 손에는 못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분은 칼로 심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못으로 심판을 당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은 심판이 아니라, 기다림과 사랑이었어요. 매번 배신하고 도망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또한 제자들을,,, 그리고 우리들을,,, 끝까지 기다리고 사랑하시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픔에 공감하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우시고 아파하셨어요. 여러분,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겪는 고통 속에서 무엇을 하시는가?” 라는 질문이 생길 때마다 기억하세요. 주님은 우리의 고통에 함께 하십니다. 함께 아파하시고, 함께 울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그리고 그분은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의 고통을 끝낼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철저한 인간으로 우리와 함께 하셨어요. 그리고 죄로 인해 힘들어하고 있는 우리의 상황을 위해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여러분, 그 예수님을 보셔야 합니다.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아가시기 바래요. 그분이 얼마나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는지를 깊이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인생의 가장 풀기 힘든 질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겪는 고통 속에서 무엇을 하시는가?” 우리가 믿는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함께 공감하시고, 그 고통을 해결해 나가는 분이십니다.
주님이 이겨내신 십자가의 고난으로,,, 우리는 모든 죄와 고통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자격을 얻었습니다. 동시에 그분이 이루신 부활을 통해 우리는 이전과 다른, 새로운 인생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죽음과 같은 상황에서 힘겨워 하고 있는 여러분에게 오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오늘 예수님이 선포하신 이 복음이 여러분 인생에 답이 되길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상황속에 주님이 부활의 소망으로 함께 하심을 잊지 마시길 바래요. 그분이 이루신 십자가의 대속이 다시 나를 자유케 할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고통을 내버려두시는 하나님이 아닌, 그 고통 속에서 함께 공감하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주님의 약속이고 은혜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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