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박진영이 주장하는 이상한(?) 삼위일체(2)
박진영은 삼위일체에 대한 그의 강의 첫 머리에 삼위일체에 대해 이렇게 말하며 시작한다.
“예수님에 대해서 공부를 시작하려고 하면 제일 먼저 우리 앞에 다가오는 어떤 관문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바꿔 표현하자면 어떤 안경을 쓰게 됩니다. 그것이 삼위일체라는 안경입니다. 신학대학교를 가신다면 이 삼위일체라는 안경을 씌워 줄 거고요. 혹은 어떤 교회에서 목사님 저 예수님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요 그러면 이 삼위일체라는 안경을 씌워 줄 겁니다. ”
그러면서 그는 신학대학교에서 가르치는 삼위일체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삼위일체와 많이 벗어나 있고, 그렇기에 이런 안경을 끼는 순간 모든 것이 어지러워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본인도 이러한 삼위일체를 다 공부해 보았지만, 도무지 모르겠더라고 주장한다. 결국 박진영에 따르면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참된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초점을 어지럽게 만드는 잘못된 렌즈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삼위일체라는 용어, 사실 이제 ‘삼위일체’란 말은 너무나 잘못된 말입니다.”
과연 박진영의 주장은 얼마나 타당할까?
첫째,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성경의 고백을 따라간 결론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교회가 임의로 발명한 것이 아니다.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마태복음 28장 19절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세례를 베풀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을 찬찬히 살펴보면 서로 구별된 세 인격, 곧 아버지(the Father)와 아들(the Son)과 성령(the Holy Spirit)이 나오는데, 이 셋을 묶는 ‘이름’은 단수형(the name)이다. 한 존재의 이름 아래 세 위격이 각각 나열되는 것이다. 복수형 ‘이름들(names)’이 아니라 단수형 ‘이름(name)’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기서 ‘이름’이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존재의 정체성과 권세와 인격 전체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각각 구별된 실재이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신적 이름, 곧 하나의 본질과 권세 아래 묶여 있음을 이 한 절에서 동시에 가르치신 것이다. 삼위일체는 신학자들이 고안해 낸 사변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말씀이 이끌어가는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도 같은 진리를 다른 각도에서 보여준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바울은 이 짧은 축도 안에 성자의 은혜, 성부의 사랑, 성령의 교제(fellowship)를 나란히 담았다. 셋은 분명히 구별된다. 은혜를 베푸시는 분, 사랑하시는 분, 교제하시는 분이 각각 따로 언급된다. 그러나 이 셋이 함께 교회에 임하신다. 여기서 ‘함께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함께하시는 임마누엘(Immanuel)의 성취다. 성자도, 성부도, 성령도 따로따로 교회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삼위의 하나님이 한 하나님으로 그의 성도들과 함께하시는 것이다. 성경은 성부가 아닌 성자를 먼저 언급하고, 이어 성부와 성령을 나란히 언급하여, 이 세 분이 동등한 동시에 구별된 분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교회는 이 말씀들을 읽으며 삼위일체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성경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고백한 것이다.
둘째, 성경은 성부는 물론이거니와 성자도 하나님이시며, 성령도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박진영은 성부와 성자는 두 하나님이시며 두 분이라고 못박으며 성령을 포함시키지 않는다. 즉 성령은 구별된 인격의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사도행전 28장 25절은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사 6:9-10)을 성령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소개한다. 히브리서 3장 7-8절은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시 95:7-8)을 성령께서 이르신 말씀으로 소개한다. 또한 사도행전 7장 51절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거역당하신 여호와가 곧 성령임을 회고하며,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 도다”고 말씀한다. 또한 고린도전서 3장 16절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곳이 곧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임을 진술한다. 이처럼 성경은 일관되게 성령을 하나님으로 소개한다. 따라서 박진영의 ‘두 하나님’은 성경이 말하는 세 분의 구별된 위격의 하나님 앞에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셋째, 삼위일체를 부정하면 구원론이 무너진다. 박진영의 주장대로 성령이 구별된 위격의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가 받은 구원 자체가 뿌리부터 흔들린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삼위 하나님의 공동 사역이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1장은 이것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성부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4절), 성자께서는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를 속량하셨으며(7절),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장차 받을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13-14절). 성부는 구원을 작정하셨고, 성자는 이를 성취하셨으며, 성령은 이를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분이다. 성령은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시며 우리에게 복음을 붙들고 죄와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이다. 만약 성령을 구별된 위격의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성령 하나님께서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사역 전체를 부인하게 된다. 결국 구원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개인의 깨달음과 결단에 달린 문제로 축소될 위험이 있다.
넷째, 삼위일체가 성경에 없다는 식으로 부인하는 것은 신천지의 논리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신천지의 경우 삼위일체를 가리켜 “성경에 없는 말”이라고 하며 부정하고, 자신들만이 성경을 제대로 읽는다고 주장한다. 이는 다른 여러 이단들도 마찬가지다. 기성 교회의 가르침을 왜곡된 비진리로 규정하고, 자신만이 성경의 진리를 회복했다고 주장하는 방식 자체가, 역사 속 이단 운동들이 반복해 온 전형적인 패턴임을 기억해야 한다.
삼위일체는 분명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어렵다고 해서 틀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인간의 언어와 논리보다 크시기 때문에 우리의 좁은 인지능력으로 파악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분을 내 논리의 크기에 맞춰 잘라내는 순간, 우리가 붙드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나의 생각일 뿐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가 그분을 이해할 수 있는 만큼 그분을 충분히 계시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삼위일체를 겸손하게 그리고 찬찬히 살피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구체적인 말씀과 함께 확고하게 붙들어야 한다. 다음 호에서는 그의 두 번째 주장, “‘하나님’은 이름이 아니라 직함이다”를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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