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무리에게 참된 제자도와 관련된 세 가지 명령(막 8:34)과 이와 관련된 종말론적 심판에 관하여 가르치시고(막 8:35-38) 난 후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높은 산에 데리고 올라가서 그들 앞에서 변화되셨습니다(막 9:2c).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된 사건(Transfiguration)은 길 위에서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와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는 마가복음 8:27-9:1절의 말씀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수난 기사 이전에 드물게 “육일 후에”(막 9:2)라는 시간적 연결 고리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셨던 시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간적 언급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관련된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막 8:29d)라는 베드로의 고백과 더불어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막 8:31)와 관련해서 사건의 연결 고리를 제공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9:1절에 기록되어 있는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 안에서 임하는 것을 볼 때까지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어떻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실현되는지 보여줍니다.
이러한 상호 본문의 연결성(coherence of content)과 더불어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서 변화된 사건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을 대면하였을 때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난 사건(출 34:29-35)을 상기시킵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모세와 같은 역할을 하는 인물로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신 것처럼, 예수님을 통하여 새 출애굽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서 변화된 사건을 통하여 새 출애굽의 역사가 예수님의 수난 예고의 절정인 예수님의 부활의 모습임을 미리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막 9:2) 그리고 육일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하셨고, 그리고 그들을 높은 산으로 사적으로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 앞에서 변화되었습니다. (3) 그리고 그(예수)의 옷들은 이 땅 위에 어떤 빨래하는 사람도 그렇게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하얗게 빛나게 되었습니다. (4) 그리고 엘리야와 함께 모세도 그들에게 보였고, 그리고 그들이 예수와 함께 말하고 있었습니다. (5)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하여 말하였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개의 장막을 만들겠습니다. 하나는 당신을 위해서, 하나는 모세를 위해서,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서.” (6) 왜냐하면 그(베드로)는 무엇으로 대답해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두렵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7) 그리고 구름이 생겨 그들을 뒤덮었고, 구름으로부터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8) 그리고 갑자기 그들이 주변을 보았을 때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오직 그들과 함께 홀로 [계신] 예수만 [보았습니다.] (Translated by YG Kim)
마가는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 이전에 자신의 복음서에서 아주 드물게 시간적 개념을 표현했습니다(막 1:9, 13, 32; 2:1; 4:35; 8:1; 9:2). 이러한 마가의 시간 개념은 예수님의 수난 기사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기록됩니다(막 14:1, 12, 30, 72; 15:25, 33, 42; 16:1).
마가가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 “육일 후에”(meta hemeras hex: after six days)라는 시간적 개념을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9장 2절의 “육일 후에”(마가와 마태와 달리 누가는 “팔일 쯤”이라고 언급함 눅 9:28)라는 표현은 출애굽기 24장 16절과 중요한 신학적 연결 고리를 가집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변화 사건을 통해 독자들이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건을 연상하도록 의도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출애굽기 24장 16절의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산에 머무는 육일 동안 구름이 산을 덮었고, 칠일째 되는 날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이러한 일치는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에서 모세를 부르시는 모습(출 26:16)과 하늘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막 9:7)과도 연결되어져 있습니다. 또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자리에서 아론, 나답,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명이 산으로 올라갔지만(출 24:1, 9),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 특정 인물들이 있었음을 생각해 보면, 이 또한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구별해서 높은 산에 올라가시는 모습과도 연결되어집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올라가셨을 때 예수님의 모습이 하얗게 변화되는 모습을 보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두려워하는 모습(막 9:3, 6)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서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모습과도 연결되어져 있습니다(출 34:29-35). 이러한 모세의 유형론(Mosaic typology)은 마가복음의 기독론(Christology)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유형론과 관련해서 Joel Marcus의 Mark 8-16, The Anchor Yale Bible 27a, APPENDIX “History-of-Religions Backgrounds to the Transfiguration”을 보십시오. pp. 1108-1118)
마가는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서 변화되는 사건을 기록하면서 그 산이 빌립보 근처에 있는 헬몬(Hermon) 산인지, 갈릴리에 있는 타볼(Tabor) 산인지 정확한 지리적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마가의 관심은 지리적 정보를 독자들에게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기에, “높은 산”의 상징적 의미를 통하여 구약 성경에서 높은 산은 하나님의 임재와 권위가 나타나는 장소임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높은 산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사적으로(in private)으로 따로 데리고 가셔서 그들 앞에서 변화되셨습니다. 특별히 마가는 예수님께서 변화되는 모습을 ‘신적 수동태’(divine passive)로 표현(metemorphothe: he was transformed)하여서 하나님의 주도적인 개입 아래에서 예수님께서 변화되셨음을 강조합니다(막 9:2c). 이러한 변화 가운데에서 마가는 예수님의 옷에 집중합니다(막 9:3). 마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사람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기에 비유적인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마치 빨래하는 자가 이렇게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하얗게 빛나게 되었다고 언급합니다. 동일한 본문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는 예수님의 얼굴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 17:2).
마가는 예수님의 변화된 옷의 모습을 통하여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났던 사건(출34:30)과 유형론적으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높은 산에서 빛나는 모습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부활 후 자신의 참된 신적 정체성을 계시하셨습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된 상태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가져다 준 인물로 구약의 언약을 대표합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 율법을 받았으며,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신의 현현(theophany)에 참여했습니다. 따라서 모세의 등장은 예수님이 율법의 계승자이자 완성자임을 나타내며, 동시에 예수님의 변화 사건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사건과 유형론적으로 연결됩니다.
또한 엘리야는 구약의 예언자들(Prophets)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말라기 4장 5-6절에 의하면,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엘리야의 등장은 예수님의 사명이 구약의 예언적 전통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예수님이 이 예언의 성취자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바라본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변화되신 높은 산에 하나는 예수님을 위해서, 하나는 모세를 위해서, 다른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서 장막을 만들자고 말합니다(막 9:5). 그러나 마가는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예수님께서 변화 되어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는 엄청난 광경 앞에서 무엇으로 대답해야 할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언급합니다. 또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두려워 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명시합니다(막 9:6).
베드로가 두려움 가운데에서 고백한 ‘장막’(skene: tent)은 구약의 장막절(Fest of Tabernacles)을 연상시킵니다. 장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장막에 거주하며 하나님의 보호를 경험했던 것을 기념하며(레 23:33-43), 동시에 미래의 메시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실 것에 대한 종말론적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슥 14:16-19). 또한 장막을 모세의 유형론에 근거해서 생각해보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회막을 연상시킵니다(출 33:7-11). 이러한 구약적 배경에서 베드로가 두려움 가운데 장막을 언급한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가 예수님을 통해 나타남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마가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메시아’(Messiah)가 아니라 ‘랍비’(rhabbi: my teacher)라고 고백하는 모습을 통하여 고난 받는 메시아에 관한 이해 없이 영광스러운 순간에만 머물고자 하는 베드로의 욕망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9장 7-8절의 말씀은 높은 산에서 예수님께서 변화된 사건의 절정을 이룹니다. 마가는 이 장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님께 신적 정체성과 권위를 부여해 주시는 모습을 기록합니다. 출애굽의 과정에서 구름은 하나님의 신적 현현을 상징했습니다. 따라서 마가는 모세의 유형론을 예수님의 변화 사건에 적용하여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이동할 때 하나님의 임재가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나타났고(출 13:21-22),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도 구름이 산을 덮었던 것을(출 13:21-22; 19:9, 16; 24:15-16; 40:34-35)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의 현현을 상징하는 구름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뒤덮었을 때 구름으로부터 소리가 있었는데, 그 음성은 “그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막 9: 7b)라는 메시지입니다. 구름 속에서 들려온 음성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들려온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무척 기뻐한다”(막 1:11b)라는 음성과 더불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하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특별히 마가복음 1장 11절에서 하늘의 음성은 마가의 메시아 비밀 모티브(Messianic secret) 가운데에서 예수님만 들으셨다고 하면, 9장 7절에서는 예수님과 더불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도 듣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백부장의 고백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막 15:39)라는 고백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됩니다.
마가는 “너희는 그의[말을] 들으라”(막 9:7d)라는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가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필연적 길임을 강조합니다. 하늘의 음성이 들렸을 때 모세와 엘리야도 사라지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만 바라보는 모습을 통하여 마가는 예수님이 율법과 예언의 최종적인 성취자이며 메시아임을 선포합니다(막 9:8).
<함께 나누기>
- 마가는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서 변화된 사건을 통하여 모세의 유형론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과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올라가서 변화되는 장면은 어떠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 예수님께서 변화되는 모습 가운데 ‘신적 수동태’가 사용되었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 예수님께서 변화되는 모습 가운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베드로는 두려움 가운데 어떠한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서 장막을 만들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구약적 의미에서 장막의 의미는 예수님과 어떠한 연결 고리가 있습니까?
- 하나님의 현현을 상징하는 구름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뒤덮었을 때 구름으로부터 어떠한 소리가 났습니까? 이 음성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특징은 무엇입니까?
복음에 빚진 자 김윤규 목사 (토론토 쉴만한물가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