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2회] 왜 우리는 리더를 ‘신격화’하는가?
부제: 사람을 넘어, 구조를 보아야 한다
사건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온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성도들과 악수를 나누고, 주차장으로 걸어가던 길에 휴대폰 화면이 번쩍인다. 또 한 번의 기사, 또 한 번의 폭로, 또 한 번의 사과문. 공동체는 순간 얼어붙고, 다음 순간 뜨겁게 끓어오른다. 마치 열병처럼. 그때마다 우리가 가장 먼저 꺼내 드는 처방은 놀라울 만큼 익숙하다. “리더를 바꾸자.”
“이번엔 정말 흠결 없는 분을 세워야 한다.”
“인격적으로 완벽한 리더가 오면 달라질 거다.”
그 말들은 간절하다. 거의 기도문처럼 들린다. 그런데 그 간절함 속에는 한 가지 오래된 습관이 숨어 있다. 우리는 리더에게 인간 이상의 도덕성과 능력을 기대한다. 그 기대가 단순한 존중을 넘어 ‘신격화’가 되는 순간, 이상하게도 공동체는 잠시 안정을 얻는다. 모든 불안이 한 사람에게 정리되는 듯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안정을 위해 우리가 지불하는 대가가 너무 크다는 데 있다.
냉정하게 말하면, 리더를 신격화하려는 그 열망 자체가 비극의 출발점이 된다. 사람을 교체하면 해결될 것 같지만, 그 사람이 서 있는 구조가 그대로라면 이야기는 다시 반복된다. “좋았던 사람”도 결국 그 자리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가 악해서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수로가 이미 썩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맑은 물도 오염된 수로를 지나면 탁해진다.
우리는 늘 ‘누가’ 그 자리에 있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더 깊은 질문은 이것이다. ‘어떤 구조’가 그 사람을 감싸고 있는가. 구조는 종종 사람의 성품보다 강하다. 견제받지 않는 독점적 구조는, 칭찬과 박수와 경외의 언어를 연료로 삼아, 리더를 서서히 다른 사람으로 바꾼다. 권력에 대한 오래된 격언이 있다. 권력은 부패하기 쉽고,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이것은 누군가를 향한 조롱이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정직한 고백에 가깝다. 우리는 그 고백을 잊어버린 채, 신격화라는 방식으로 한 사람에게 권력을 몰아준다. 그 순간 리더가 가장 먼저 잃어버리는 것은 ‘자기 객관화’다.
신격화된 리더의 주변에서는 세 가지가 조용히 사라진다.
첫째, 투명성이 사라진다. 보고는 점점 정제되고, 정보는 점점 필터링된다. 리더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둘째, 건강한 피드백이 사라진다. 질문하는 사람은 “불순종”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되고, 다른 의견은 “공동체를 흔드는 말”이 된다. 결국 침묵이 늘어난다. 침묵은 평화를 가장하지만, 사실은 공포의 다른 이름이다. 셋째, 책임의 균형이 사라진다. 모든 결정과 책임이 한 사람에게 쏠릴수록, 그 사람은 실패의 공포를 느낀다. 공포는 권력을 더 움켜쥐게 하고, 더 움켜쥘수록 구조는 더 폐쇄된다. 악순환이 시작된다.
교회는 왜 이런 구조에 더 취약할까.
그 이유는 교회가 가진 아름다운 언어가, 때로는 위험한 방패가 되기 때문이다. ‘영적 권위’라는 말은 본래 섬김을 위한 언어인데, 어느 순간 검증을 거부하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일반 조직에서는 절차와 규정이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된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뜻”, “기름 부으심” 같은 말이 모든 질문을 압도해 버릴 때가 있다. 그 순간 권위는 공적 책임을 떠나 사유화된다. 그리고 리더 한 명에게 권위가 집중된 공동체에서 리더의 퇴장은 곧 체계의 붕괴처럼 느껴진다.
결국 “그래도 아들이 낫지 않겠나”라는 말이 나온다. 그 말은 혈연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불투명한 구조를 선택하는 것이다. 시스템의 책임을 포기한 자리에서, 사유화된 권위가 자신을 가장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을 택할 때, 우리는 ‘세습’이라는 단어 앞에 서게 된다. 우리는 종종 세습을 한 개인의 탐욕으로만 해석한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보면, 세습은 ‘시스템의 부재’가 낳는 극단적 자기방어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깨어나야 한다.
사람은 언제든 넘어질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가 넘어지지 않도록 돕는 구조를 함께 세우는 일이 더 성숙한 신앙에 가깝다. 건강한 구조는 리더를 공격하려는 장치가 아니라, 리더를 보호하는 울타리다. 리더가 ‘신’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숨 쉬는 인간으로 설 수 있다. 목회자도, 장로도, 리더도 결국 사람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세워 주는 것이 공동체의 성숙이다.
한국 교회의 비극은 매번 사람을 정죄하고 끝내는 데서 반복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인격이라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일을 멈춰야 한다. 사람의 문제를 말하기 전에,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구조를 보아야 한다.
다음 글에서는 우리가 리더에게 씌워 준 ‘거룩의 가면’은 어떻게 그의 내면에 어두운 그림자를 키우는 힘, 곧 ‘이상화와 그림자’를 살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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