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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그런뜻이었구나] 은혜 (5) 선물의 극대화

은혜 (5) 선물의 극대화

베드로는 하나님을 “모든 은혜의 하나님”으로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직면한 모든 상황에서 충분한 은혜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설명한 것입니다. 우리 삶의 영역 중에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된 곳은 없습니다. 은혜는 마치 태양이 온 대지를 비추는 것과 같이 신자의 삶 전체 영역에 나타납니다. 누가는 구원이란 전적으로 “주 예수의 은혜”로 이뤄진다고 그 기원을 밟힙니다. 선행, 도덕, 그리고 율법 준수가 결코 미칠 수 없는 영생의 일은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히브리서는 성령을 수식어 “은혜”를 덧붙여 “은혜의 성령”이라 표현합니다. 성령의 운행하심은 그 중심이 은혜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시작이 은혜입니다. 이 진리를 성경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설명합니다. 신앙 생활은 은혜를 통해 성장하며 열매 맺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자신의 경험을 나눕니다. 신앙 생활의 끝은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은혜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며 총합니다.

   고대 철학자들은 자연 자원들의 풍성함을 보면서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로 세상이 그것을 다 담을 수도 없고 그 인간이 다 받을 수도 없을 만큼 넘치도록 주어지는 초충만한 (superabundant)  것으로 여겼습니다. 필론은 하나님의 은혜를 “끊임없고 마르지 않는 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끊없이 풍성한 보물창고”로 표현했습니다. 선물인 이 은혜는 수혜자의 가치와는 상관없이, 그리고 어떤조건도 없이 하나님의 자발적인  선행으로 이뤄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은혜는 인간의 기여도 없이 하나님의 전적인 주도권에서 무조건적으로 제공되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초기 교회 성도들에게 이 은혜는 확연한 실재였으며 그들 믿음의 중심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쓴 글에서 “우리 주의 은혜가 넘치도록 풍성하다”고 자신의 경험을 말합니다.  그는 에베소 교회에 쓴 편지에서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는 현재 뿐만 아니라 앞으로 올 모든 세대에게 드러나 보여진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은혜에 관한 진술들은 역사 속에서 성도들의 일상에서 이 넘치는 은혜 (바클레이의 표현에 따르면 은혜의 극대화)의 실재성에 대하여 교회가 진지하게 모색하도록 동기를 부여했습니다. 그 결과 은혜는 잘못 이해되어졌고,크게는 두 오해를 가져 왔습니다. 

   첫째는 율법을 아무 가치 없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이 사람들은 은혜에 완전 매료되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생활규범을 망각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은혜를 베푸시는 선하신 하나님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은 단지 “선하신”  정도가 아니라  “지극히 선하시며,”  하나님의 유일한 사역 방식은 “최고의 완벽한 선”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구원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이 사람들은 “죄가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친다”와 같은 성경 구절들을 좋아 합니다. 이 사람들은  죄를 지을 수록 더 행복할 것이고, 죄가 많을 수록 은혜를 더 깊게 경험할 것이다고 생각하여, 사람들에게 죄를 짓도록 충동질합니다. 전문적인 용어를 도입하면 이런 가르침은 “율법 폐기론”으로 , 그리스도인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미 영원한 용서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어떤 종류의 생활을 하든지 그것은 더 이상 중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라고 은혜의 기능을 말씀합니다. 은혜는 율법폐기를 조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혜는 율법을 확립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고 말씀하십니다.

   두번째는 선한 행위를 통해 은혜를 극대화 하려는 태도입니다.유대교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와 진다고 가르칩니다. 로마 카톨릭은 구원은 교회 제도에 대한 충성에 달려 있다고 주장합니다. 개신교 안에도 선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믿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소위 율법주의 자들로서 사람의 행위가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는 근거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에 반대해서, 성경은 인간의 선을 의지하는 것을 완전히 배제시키지 않는 믿음의 공언은 하나님 보시게에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유대 종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갈라디아인들에게“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고 경고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행위를 드러내기 위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주체적 선행을 모호하게 하는 것은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의 교리만을 생각하며 신앙인의 책임을 회피하게 되면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는 강력한 은혜의 힘을 거절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 삶에 은혜를 극대화하는 원칙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by grace) 믿음으로 말미암아 (through faith)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은혜와 믿음은 상호 연관성이 있습니다. 믿음은 자격 없는 자들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춥니다. 믿음은 우리가 가진 부족함으로부터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의 자원으로 향하는 우리 영혼의 행동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선행이나 능력이나 지혜를 자랑하지 못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독자적인 행위와 자기 충족적인 은혜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극대화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바울은 자기 안에 사시는 그리스를 믿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삶에 행하실 능력의 일들과  자신의 삶을 통해 이루실 선한 역사를 기대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이렇게 밝힙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믿음은 사람의 자랑을 억제하고 은혜의 영광을 높이 드러냅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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