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 “파종의 창작물”
열매를 의미하는 희랍어 “카르포스”가 처음 사용된 자료는 고대 시인 호메로스의 서사시『일리아스』입니다. 그는 땅에서 나는 일반 곡물이나 나무에서 생산되는 물건을 “열매”라 했습니다. 크세노폰은 이 낱말을 상징적으로 사용하여 동물의 새끼를 열매라 했습니다. “동물들은 자신들이 낳는 새끼를 통해 주인이 원하는 대로 이익을 누릴 수 있도록 허용한다. 다시 말하지만, 가축 떼가 사육사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거나 자기들을 통해 발생하는 이익을 주인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거절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어미가 낳는 새끼는 사육사가 얻는 열매였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이성의 창작물을 열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즐기도록 식물이 열매를 제공하는 것처럼, 그에 상응하게 이성의 활동이 만든 모든 것은 열매였습니다. 예를들어 인간 삶에 기쁨을 주는 춤이나 연극이나 노래와 같은 것들이 열매였습니다.
로마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열매에 관해서 이렇게 기술합니다. “인간과 신 그리고 만물은 모두 열매를 맺는다. 적절한 계절에 각각 열매를 생산한다. 그러나 이 단어 사용이 포도 나무나 물건들에 한정하게 되면 이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우리의 이성은 인간 자신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들을 위해 열매를 맺는다. 할 수 있으면 잘못을 행하는 사람들을 가르쳐 징계하라. 당신은 진실로 친절하라. 비참한 사람처럼 일하지 말고, 동정심을 받거나 존경을 받기 위한 사람처럼 일하지 말라. 대신 오직 한 가지에 당신의 뜻을 집중하라. 그것은 사회가 필요하고 또 요구하는 대로 자신을 움직이고 자신을 억제하는 것이다.” 이성의 창작물인 열매는 인간 사회에 영향을 행합니다. 그 열매는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열매는 창조 시에 설계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의 풀과 채소와 나무를 창조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께서 하신 첫 번째 명령은 열매 맺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성경의 마지막 장도 열매 맺는 이야기입니다.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선택하신 삶의 유형은 열매가 수고의 결실로 나타나는 농경 사회였습니다. 성경의 필자들은 그것을 활용하여 천연 과일과 영적 열매 사이의 생생한 비유를 이끌어 냈습니다. 모든 만물이 열매를 맺는 것처럼 인간 삶의 모든 추진력은 악하든 선하든 필연적으로 열매를 향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사람의 행실이 그들의 열매를 좌우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절대적인 사항은 사람이 좋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세례 요한은 한 성도가 진정으로 회개 했는지는 선행의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선행은 없이 율법과 전통만 주장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경고합니다. 그들의 열매인 인간의 행위는 그들의 내면의 본성을 아는 표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세례 요한은 나무의 가치가 그 열매로 평가되는 것처럼 사람의 행위로 나타나는 의는 하나님의 심판을 위한 결정적인 기준이 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한 개인의 가치는 행위를 통한 열매로 평가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결국 삶에서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거절의 위협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이렇게 알립니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회개의 필요성을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회개 후에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열매 맺는 삶의 원칙은 무엇입니까?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열매 맺는 근본 원리라는 것을 포도나무 비유로 설명합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열매를 맺게 하는 근원은 성령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열매를 또한 빛의 열매라고도 표현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성결한 삶은 그리스도인이 성령과 동행하여 경험하는 열매입니다. 역으로 기독교 이전의 사람은 죄의 권세 아래 있었고 그에 상응하는 열매를 맺습니다. 이 질서에 관해서 바울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우리 말에 “종두득두種豆得豆”가 있습니다. 밭에 콩을 심으면 콩을 얻고, 팥을 심으면 팥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농부가 옥수수 씨를 뿌리면 옥수수가 납니다. 옥수수 아닌 것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성도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결정하고 결정한 그 것을 자신의 삶의 정원에 씨를 심어야 합니다. 자신이 뿌린 것을 결실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단지 자신의 육체를 즐겁게 하기 위해 인생을 탕진하거나 낭비적인 것에 탐닉하며 자원을 허비하는 씨를 심는 성도는 반드시 썩어질 것을 추수하게 됩니다. 대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우리의 마음과 시간과 그리고 물질을 쏟는 씨를 심는다면 세월이 더딜지라도 기필코 성령께서 하시는 열매를 얻게 됩니다.
이남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