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 “하지 말 것과 할 것”
고대 아테네에서 활동했던 시인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이온』에 슬픔을 달레는 대사가 있습니다. 신전에서 울고 있는 크레우사에게 이온은 “당신 안에는 고귀함이 있고, 당신의 성품이 무엇인지를 증언하는 예쁜 외모가 있습니다. 아! 부인이여, 왜 슬퍼하세요? 당신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는 걱정은 무엇입니까?” 걱정으로 번역되는 희랍어 “메림나”는 진정한 고통과 그것을 경험하는 마음의 힘든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그리스의 저술가 크세노폰은 “인간은 하늘의 비밀을 이해 할 수 없다”고 주장했던 소크라테스가 하늘의 현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비판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이러한 문제 (원리)에 에 개입한 자들은 신성한 질서를 설명하기 위해 미친 자부심을 가졌던 아낙사고라스처럼 완전히 제정신을 잃을 위험이 있다.” 인간들이 열정을 갖고 탐구하는 사물의 근본 문제를 소크라테스는 희랍어 “메림나”로 표현했습니다.
파피루스에는 부재 중인 남편에게 아내가 쓴 편지 내용이 있습니다. “밤낮으로 나의 유일한 걱정은 당신의 안전이기 때문에 잠도 이룰 수 없어요.” 사랑하는 남편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현한 걱정은 “메림나”입니다.
희랍어 메림나는 “걱정,” “염려,” “돌봄,” “야망,” 그리고 “슬픔”의 뜻을 갖습니다. 이 단어에는 두 색깔이 있습니다. 위에 언급된 어여쁜 여인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삶의 염려와 사랑하는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의 염려는 서로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에서 자주 언급되는 이 단어는 두 의미로 사용됩니다. 예를 들면 뿌려진 말씀의 좋은 씨의 생명이 싹을 트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이 세상의 염려와, 사도 바울이 교회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전자는 일반 삶에서 직면하는 염려고, 후자는 교회가 맞닥뜨리는 영적인 염려입니다. 바클레이는 전자를 하지말아야할 “그릇된 염려”로, 그리고 후자를 해야 할 “옳은 염려”로 구별합니다.
두 염려 중에, 우선 그릇된 것으로 하지말아야 할 염려에 관해서 살펴봅니다. 첫째, 너무 많은 세상 일에 관여함으로 겪게 되는 불안과 염려는 하지 말 것입니다. 사람이 현세의 일에 너무 몰두하여 영원한 일을 생각할 시간이 없다면 그는 위험한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한 개인이 사람들과 너무 많이 어울려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도 시간이나 예배 시간을 가질 수 없다면 그의 존재는 위험한 것입니다. 내일 되어질 일에 대하여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도 하지말 것에 속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 삶에 가장 필수적인 먹고 입는 것과 생명은 염려를 통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물을 다시리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둘째, 비본질적 문제로 에너지를 소비하는 염려는 하지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을 향해 불평하는 마르다에게 이 사실을 말씀합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다.” 본질적인 것을 잊고 일에 분주했던 마르다의 태도는 그릇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과 이웃과 평화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직면한 시련과 핍박을 대처해야 할 염려는 하지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우리 곁에 계시는 성령은 우리의 필요에 즉각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진실한 사람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넷째,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한 염려는 하지 말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장가간 남자는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 그리고 시집간 처녀는 남편을 기쁘게 하기 위해 염려한다는 것을 언급한 후에 “너희가 염려가 없기를 원하노라”고 조언합니다. 그 이유를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고 밝힙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집중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충분히 두려워하게 되면 결코 그 어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이제 올바른 염려, 즉 해야할 염려의 종류를 살펴봅니다. 이 염려에 관한 언급은 주로 바울이 교회에 보낸 편지에 많이 나타납니다. 첫째, 서로의 기쁨과 고통을 돌아보는 염려는 해야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원리를 인간의 몸과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메림나오)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서로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눌 때 돌봄이 현실이 됩니다. 실제로 우리 자신의 걱정을 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사람의 걱정을 함께 짊어지는 것입니다.
둘째, 공동체 안의 동료를 위하는 염려는 해야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디모데를 보내는 이유를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메림나오)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고 밝힙니다. 디모데는 빌립보 교인들의 필요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가슴으로 빌립보 교회를 시작할 때, 디모데는 바울과 동일한 심정으로 그 교회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디모데가 가졌던 염려가 옳은 걱정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교회를 생각하는 염려는 해야할 것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먼저 나열합니다. 자신은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했으며 늘 생명의 위험에 직면했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리고 옳은 염려을 설명합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교회에 대한 바울의 염려는 큰 부담이자 특권이었습니다. 자신의 교회를 위해 염려하는 마음은 곧 그리스도 예수가 가지셨던 마음입니다.
베드로는 목숨을 위하여 그리고 내일 일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러분의 염려를 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살피고 계십니다.” 바울도 이 말씀을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라고 바꿔서 말합니다. 우리 안에 일어나는 걱정에 대한 근본적인 치료 방법은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사람을 위해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동료를 위해 그리고 교회를 위해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생각과 보살핌과 염려를 갖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며 책임입니다. 이남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