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것, “기독교 독점물”
성경 시대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포도주를 유리병에 담아 보관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염소나 소 혹은 낙타 가죽을 말려 부대를 만들어서 그 속에 담았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가죽 부대는 술이 발효되면서 자연스럽게 팽창되어 얇고 연해졌기 때문에 술을 담지 않았습니다. 술을 제조하는 양조가들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했습니다. 유대 전통과 사상이 사회 전반에 만연하던 때에, 예수님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새로운 삶의 형태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기독교는 기존의 구조 안에서는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접근과 새로운 체계가 필요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고전 시대 이래로 새로운 것을 의미하는 가장 흔한 두 단어는 “네오스”와 “카이노스”입니다. 네오스는 이전에 그곳에 없던 것이 긍방 혹은 새로 나타난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건물이 이전에는 그 도시에 없었는데, 지금은 새롭게 나타났습니다. 사람으로 비유하면 새로 태어난 자로 아직 장성하지 않은 젊은이를 의미합니다. 은유적으로는 발달되거나 완성이 되지 않은 미성숙함과 오랜 전통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이 새로운 것은 시간적으로 이전과 비교한 현재 순간에 속합니다. “그 때”와 비교한 “지금”입니다. 성경에 사용된 새것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새부대와 발효 중인 새 술, 낡은 옷과 비교되는 새 옷, 옛 언약과 비교한 새 언약,새로 반죽한 누룩 덩어리,새 임금, 등.
네오스에 비교해서 카이노스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으로 일반적인 것과 다르며, 인상적인 것이고, 더 좋은 것이며, 매력이나 가치에 있어서 우수한 것입니다. 카이노스는 “현재까지 사용되지 않았던 새 것,” 이례적인 것과 흥미로운 것, 특히 “종류에 있어서 새로운 것”으로 번역 됩니다. 신약성경에서 주로 사용되는 새 것은 카이노스입니다. 네오스는 이전에 없었지만 현재 구현된 현상인 새 것에 제한되어 사용되지만, 카이노스는 예수님께서 우리 삶에 이미 이루신 구원과 같은 새로운 일들 뿐만 아니라 미래에 나타날 새것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카이노스는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새로운 세계이며, 그리스도인이 현재와 미리에 경험하는 새 삶의 형태입니다. 신약성경은 일반 사람들은 접근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만이 실제로 참여하고 맛보고 즐기는 새로운 요소들을 소상이 기록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새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시작된 새로운 생활은 인간 존재를 새로 태어나게 합니다. 그 결과 새 시대가 열리고, 새 나라의 시민이 되며, 그리고 새로운 사람의 창조를 가져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인 그리스도인은 자연적으로 새로운 공동체에 소속됩니다. “이제 여러분은 더 이상 낯선 나그네나 손님이 아닙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거룩한 시민이요 가족입니다.” 그들의 인생 관, 세계관, 가치관, 윤리관 등은 일반인들의 것과 다른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것입니다. 이 새 사람은 단번에 성숙의 단계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 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새 교훈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셨습니다. 그 나라의 가치와 질서는 이세상의 것과 다른 이 질적인 것으로 새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을 때 사람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습니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과 같지 아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 그곳에 한 귀신들린 자가 소동을 치자,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인간 속에 있는 더러운 영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사회 지도자 계급이었던 서기관들의 가르침에는 이런 권세가 없었습니다. 놀란 무리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권세 있는 “새 교훈”이라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 마음 속의 부폐하고 더러움을 제거하는 질적으로 새로운 교훈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키지 않고 지나치게 앞서 나가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을 함께 모시는 사람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새 사명이 있습니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어야 하는 것처럼, 새 피조물인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삶의 현실이 존재하고 그곳에서 살아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이 실현해야 하는 사명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랑의 실천은 새 피조물의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도 요한은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라고, 그리스도인의 사명의 위대성을 밝힙니다. 넷째,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세계가 보장되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심판이 있고,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십니다. 종말의 일을 요한은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묘사합니다. 이 때 그리스도인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거주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곳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대하는 사람들입니다. “보아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다. 옛날 일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내 백성이 내가 창조하는 것 때문에 영원히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이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쁨이 가득한 성으로 만들겠고, 그 백성을 즐거움이 가득한 백성으로 만들겠다.” 우리에게 보장된 그곳은 이 땅의 것들이 변형된 것이 아닌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새 희망의 나라입니다.
이남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