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 (3), “하늘의 소리를 땅의 언어로”
흔히 “예언”이라 하면 미래의 사건을 미리 내다보는 신비한 예지력이나 길흉화복을 맞히는 점술적 기능만을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증언하는 예언의 본질은 이러한 세간의 통념과는 그 궤를 완전히 달리합니다. 예언자는 단순한 점술가가 아니며, 자신의 의지가 소멸된 채 신의 음성을 기계적으로 받아 적는 수동적인 매개체도 아니었습니다. 예언의 근본은 하늘의 세밀한 음성을 땅의 언어로 번역하여 선포하는 “하나님의 소리를 내는 메신저”입니다. 아브라함 헤셀은 예언자를 “하나님의 인격적 관심(Divine Pathos)에 사로잡힌 존재”라고 정의합니다. 이는 예언자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우체부를 넘어, 하나님의 고통과 기쁨을 자신의 감정으로 체휼하며 그분의 심장 소리를 세상에 울려 퍼지게 하는 통로였음을 의미합니다. 월터 브루그만은 예언자는 하나님의 탄식을 언어화함으로써 마비된 세상에 하늘의 소리를 복원하는 하나님의 대변자라고 했습니다. 또한 게르하르트 폰 라트는 예언자를 이스라엘의 전통을 현재의 위기 속에서 새롭게 해석하여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선포하는 “전승의 해석자”로 규정했으며, 요한네스 헤스펠은 예언자가 신적 의지에 사로잡혀 자신의 인격 전체를 투여하는 “하나님의 도구적 인격”임을 강조했습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자기 영혼에 담아 치열한 역사의 현장에서 그분의 살아있는 소리를 토해냈던 뜨거운 심장의 메신저였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앞날을 말하는 자들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실재를 인간의 삶으로 증명해낸 이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는 때로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성전 건축을 열망하는 다윗에게 즉각 찬성표를 던졌다가 밤사이 하나님의 교정을 받은 사건이나, 사무엘이 이새의 장남 엘리압을 보고 왕재(王材)라 확신했다가 거절당한 사례는 예언자의 지식이 결코 전지(全知)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고 명시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에게 다가오시는 통로는 실로 다양했습니다. 때로는 사무엘에게 임했던 것처럼 주변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외부의 음성”으로, 때로는 이사야나 열왕기상의 무명 선지자에게 임했던 것처럼 오직 당사자만 인지하는 “내부의 음성”으로 임했습니다. 또한, 엘리사의 사환이 보았던 불 병거처럼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 실체를 보게 하는 “영안의 개방”이나, 에스겔이 경험한 마른 뼈의 부활 같은 “환상과 그림”의 형태를 띠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과정에서 성령의 영감이 작용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예언자의 개인적 경험과 언어적 특성을 존중하시되, 그 전달 과정에서 오류가 없도록 간섭하셨습니다. 이는 예언이 단순한 인간의 통찰이 아니라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임을 확증합니다
예언자가 받은 메시지는 다양한 전달 양식을 통해 청중에게 도달했습니다. 구두 메시지와 설교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으로 예언자가 왕이나 지도자에게 직접 나아가 짧고 강렬한 책망이나 격려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단의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의 어린양” 비유나 엘리야의 왕을 향한 심판과 격려 선포가 그 예입니다. 나아가 모세나 발람의 경우처럼 논리적이고 긴 담화의 형식을 띠기도 했습니다.
창세기의 족장들은 임종 직전 후손들의 미래의 축복을 예언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이삭이 야곱과 에서에게 준 축복은 자신의 인간적인 선호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계획이 어떻게 관철되는지를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입니다. 아버지 이삭은 큰 아들 에서처럼 변장한 동생 야곱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라고 예언하고, 축복을 빼앗긴 에서에게 “네가 살 곳은 땅이 기름지지 않고 하늘에서 이슬도 내리지 않는 곳이다.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라고 예언합니다.
어떤 경우에 예언자들은 말보다 강력한 시각적 효과를 위해 기이한 행동을 수행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심판과 부패의 상징인 썩은 베 띠를 보여주거나 철저한 파멸의 선포를 위해 토기장이의 그릇을 깨뜨린 것, 에스겔이 예루살렘의 포위를 묘사하기 위해 기와 옆에 수백 일을 누워 있었던 것 등입니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러한 상징적 행위가 실제가 아닌 “환상”에 불과했다고 주장합니다. 예컨대 이사야가 3년 동안 벌거벗고 다녔다는 기록이 부적절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나 이런 예언들을 환상으로 치부하는 것은 메시지의 사회적 파급력을 간과하는 처사입니다. 예언자의 파격적인 행동은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그들이 외면하고 싶어 했던 하나님의 심판을 직시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행동 예술”이자 “시각 언어”였습니다.
말라기 이후부터 세례 요한이 등장하기 전까지 약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요세푸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시대에 “예언자들의 정확한 계승”이 끝났다고 기록했으며, 마카베오서 역시 당대에 예언자가 없음을 탄식하며 새로운 선지자를 기다리는 백성들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시몬 마카베오를 지도자로 세우면서 “신뢰할 만한 예언자가 나타날 때까지” 시몬이 자신들의 지도자가 되는 것에 모두 동의했습니다.
일각에서는 예언자들이 선포한 평화의 예언이 실패했기 때문에 운동이 소멸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 같은 참 예언자들은 오히려 나라의 멸망을 정확히 예고했습니다. 예언의 중단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기록된 계시(구약 성경)가 충분히 주어졌으며, 메시아의 오심이라는 거대한 전환점을 앞둔 ‘거룩한 침묵’의 기간이었던 것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대한 간극을 메우기 위해 부름받은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감정의 동요를 겪고(엘리야), 때로는 하나님께 항변하기도 했지만(하박국), 결국 성령의 인도 아래 진리를 사수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더 이상 구약과 같은 새로운 계시는 필요치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이 보여준 태도, 즉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면서도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 앞에 타협하지 않았던 그 “예언적 의식”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회복해야 할 가장 시급한 가치일 것입니다. 이남규 목사.




![[칼럼:아! 그런뜻이었구나] 가정, “보물창고”](https://i0.wp.com/toronto.christiantimes.ca/wp-content/uploads/mean.png?resize=324%2C160&ssl=1)
![[칼럼:아!그런뜻이었구나] 중대한 임무 수행을 위한 테스트, “수난” pink pencil on open bible page and pink](https://i0.wp.com/toronto.christiantimes.ca/wp-content/uploads/pexels-photo-272337-1.jpeg?resize=324%2C160&ssl=1)